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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메 Jan 12. 2017

어느 일요일, 어느 그르노블

이천십칠년 일월 팔일 사진일기

일시: 08 Jan. 2017

@Grenoble, France


#사진은 클릭하거나 터치하시면 확대됩니다:)

오랜만에 브런치에 들어왔다. 쓰고 싶은 게, 아니면 써야 할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무엇부터 써야 할지 고민이 되었지만, 최근에 내 눈에 담아온 새로운 모습의 그르노블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1월 8일, 아침에 눈이 살짝 내렸지만 뜨거운 햇살이 내리니 금방 녹아내려 그나마 연하게 쌓여있던 눈도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던 낮 12시. 난 같은 학교 언니네 기숙사 부엌에서 새해맞이 떡국을 먹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틀 전, 올해는 떡국은 못 먹겠구나 체념하던 차에 언니에게 연락을 받아, 잔뜩 들뜬 마음으로 언니네 기숙사로 향했다. 언니가 만들어준 떡국은, 새해가 되어 앞으로 다가올 취업활동 준비 생각에 푹푹 나오던 한숨도 잠시나마 어디론가 보내버릴 만큼 맛있었다. 후식으로 언니가 꺼내온, 언니의 이탈리안 친구가 만들어줬다는 티라미수도 맛있게 먹었다.(고마워 언니♡

별 특별할 것 없는 일요일이었지만, 기분 좋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트램 B선 La Tronch Hôpital역에서 내려서 다리 아래를 거닐며

밥도 든든하게 먹었으니, 난 언니네 기숙사를 나온 후 집이 아닌 트램 정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 계획이 없는 휴일이었지만, 가만히 방에 박혀 있기에는 따스한 햇살과 조금은 차가운 바람이 밖을 좀 보라고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바람의 차갑고도 따스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목적지도 정해두지 않은 채 트램을 탔다. 늘 타는 B선이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여행하는 기분으로 그르노블을 보자는 마음에 유심히 밖을 바라봤다. 


다리 아래 산책로를 걸으며


보는 마음가짐을 달리 하니, 보이는 것도 달리 보였다. 늘 지나가던 정거장도 내려서 그 주변을 돌아다녀 보면 내가 모르던 길이 하나 둘 나오곤 했다. 


다리 위에 정거장이 있는 La Tronch역도, 늘 다리 위만 다녀봤지 다리 아래로는 내려가 본 적이 없었다. 영하로 내려간 날씨 탓인지 일요일인 탓인지 사람 하나 안 보이는 다리 아래 산책로조차, 그런 내겐 새롭고도 예뻐 보였다. 





일요일의 시가지

 La Tronche역에서 다시 트램을 기다리자니 덥수룩한 배 꺼지게 할 겸 걷고 싶은 생각이 들어, 시내까지 걷기로 했다. 30분간 걸어 도착한 시내는, 역시나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레스토랑이나 음식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았고, 거리를 거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래도, 문은 닫았을지 언정 창문 너머로 보이는 물건들 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즐거웠다. 사진 속 서점 창문에 보이는 책들을 보는 노부부도 그런 마음이겠지. 


일요일에도 운영하는 버블티 가게.


그래도, 개중에는 문을 연 가게도 있었다. 지나가다가 보이던 버블티 가게도, 손님은 없었지만 조그마한 간판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직 이 곳 버블티를 마셔야지 마셔야지 생각만 하고 못 마시던 터라 순간 고민했지만, 아까 먹은 떡국과 티라미수가 아직 소화가 되지 않은 탓에 일단 오늘은 포기했다. 


꼭 내가 떠나기 전에는 마시길 다짐하고 다짐하며, 버블티 가게 앞을 지나갔다. 





아차, 나 오늘은 여행하는 마음으로 다니기로 했지. 


늘 다니던 거리를 계속 돌아다니다 아까 트램에서 했던 다짐이 문득 생각났다. 어쩐지 계속 새로운 느낌 없이 늘 익숙한 곳만 돌게 되는 것 같더라. 익숙한 곳에서 새로워지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난, 아는 길이 아닌, 처음 보는 골목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길을 잃는다 할지라도 어느 길이든 다 아는 길로 통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방향을 틀었다. 



이런 곳에 영화관이 있었네? 


방향을 틀고 지도 없이 앞만 보고 걸어가 보니, 정말로 새로 보는 골목과 건물이 속속히 등장했다. 그르노블에 있는 영화관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또 다른 작은 영화관이 있었다. 상영작을 보니, Pathé 같은 대형 영화관에서는 안 하는 영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게 작은 영화관의 묘미랄까나. 





댄스학원 앞에서.

영화관을 지나 계속 걷다 보니, 춤추는 댄서가 그려진 벽과 함께 댄스학원이 나를 맞이했다. 새삼 그르노블이 참 예술적인 동네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댄스학원을 시작으로 각각 곳곳에 예술이라는 이름의 그래픽이 벽에 그려져 있었으니. 셔터를 안 누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를 위한 타이머도 안 걸 수가 없었다. 이 날은 카메라를 방에 두고 와서 아이폰밖에 없었는데, 아이폰만으로도 충분했다. 여행객의 기분으로 거닐자니, 부끄러움도 하늘 어딘가로 날아가버린 것만 같았다. 댄스학원 앞이니 이런저런 포즈를 취해보지만, 난 잊고 있었다. 내 다리는 90도 이상 올라가 본 적이 없다는 걸. 


그러한 들 어떠하리. 그래픽과 함께 어우러지는 게 그냥 즐거웠다. 



벽들도 여러 예술가와 비행소년들의 손을 거쳐왔는지, 그 그림체나 세계관이 제각각이었다. 해석이 난해한 그림도 있는가 하면, 보는 사람 애절하고도 행복하게 만드는 그림도 많았다. 그르노블 토박이 전 썸남은 그래픽은 그냥 낙서라고, 예술이 아니라고 그래픽을 비난하곤 했지만, 지금 눈 앞에 그르노블의 그래픽을 마주하고 있는 난 생각이 좀 달랐다. 어째 이걸 그냥 낙서라 생각할 수 있는 걸까. 그런 너야말로 내겐 낙서 같은 존재였는데. 괜히 쓸데없이 그놈 생각이 나서 눈을 찡그렸다.(나쁜 새ㄲ...) 얼른 다시 키스하고 있는 두 아이의 그림을 보며 마음과 기억을 정화시켰다.  




이 곳 그림들은 뭐랄까, 이 곳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가 있었다. 구석진 벽도 아닌 차고 커튼에 단정히 그려져 있는 세 여자도 그랬고, 빌라 단지 사이사이 벽 옆면에 크게 그려져 있는 두 고래도 그랬다. 왜 여태껏 이리 예쁜 거리들을 난 몰랐던 걸까. 4개월이라는 시간이 괜히 아깝게 느껴졌다. 그래도 뭐, 괜찮다. 아직 3주나 남았으니, 남은 그르노블 숨은 명소들도 다 찾아내고 말 것이다. 



그런 다짐을 하는 사이, 겨우 아까 먹은 점심이 다 소화가 되었는지, 단 게 당겼다. 아까 지나가던 버블티 가게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바람에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계속 걷던 찰나, 어디선가 많이 본 적 있는 카페가 내 눈을 스쳐 지나갔다. 다시 고개를 돌려 유심히 보니, 이게 웬걸. 프렌치 커피숍이 떡하니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인데,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언젠가 꼭 가봐야지 하고 못 가본 카페 중 하나였다. 오호라~하며 빨려 들어가듯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날은 추웠지만, 차가운 게 당겼다. 초코 프리오라는 이름의 셰이크 비슷한 음료수를 마셨다. 약 3시간 동안 걸으면서 맞아온 추위가 오히려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난, 달달한 초코와 함께 오늘의 그르노블 탐방을 끝냈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더 많이 걷고, 더 많이 발견하고 싶다.


[프랑스에서 살아남기] 매거진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Sung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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