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동작구 이수역 13번 출구 바로 앞은 꽤나 넓은 규모의 땅이 팬스가 둘러진 채 나대지 형태로 콘크리트 바닥만 형성하고 있다. 지난 2021년 10월 31일 문을 닫은 서울에 마지막 남았던 지역 백화점인 '태평백화점' 부지이다. 태평백화점은 1992년 문을 연 이후 29년 동안 IMF 외환위기, 서브프라임 사태 등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강인한(?) 기업이었다. 지방의 명물처럼 존재하는 지역 백화점은 지역민들의 애정과 추억으로 유지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러나 태평백화점은 대기업 계열 백화점이 우글우글한 서울의 한복판에서 무시무시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은 걸 보면 대단한(!) 전략이 있어 보인다.
이수역 인근 아파트에서 거주 중인 나 역시 태평백화점은 어떤 면에서 편리한 공간이었다. 지하철 4,7호선 이수역에서 바로 연결되었고, 지하에는 내 연령대에 맞는 패션관과 GS슈퍼가 있어 퇴근길에 쇼핑하거나 장을 봐서 집에 갈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1층부터는 잡화류와 의류 등을 판매했는데 고가의 브랜드는 전혀 볼 수 없었고, 중저가 제품들이 많았는데 락포트 구두를 아웃렛 가격의 느낌(?)으로 살 수 있었다. 심지어 백화점 상층부에는 헬스장과 수영장까지 있어 수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일반적인 백화점의 전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백화점이었다. 글을 쓰고 나니 더 괴이한 느낌이 든다.
태평백화점 운영 당시 모습(출처 : 한국섬유신문 네이버포스트)
무튼 급히 비싸지 않은 물품을 사야 할 땐 편리하게 이용했는데 코로나가 한참이던 2021년 폐업을 한다는 소식을 언론매체를 통해 전해 들었을 땐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후화된 건물을 전혀 수리하지 않고 고객을 맞이한 부분과 가끔 들렀을 때 보면 박스상자가 화장실 앞 고객들이 앉는 벤치 좌우로 잔뜩 쌓인 모습, 점점 문을 닫는 기존 점포들을 보았을 땐 필연적인 일이었다. 실제 매출 추이를 보면 2011년 800억대에서 2019년 104억 원, 2020년 67억 원까지 감소했으며 실제 영업이익은 3억 원으로 겨우 손익분기점을 넘긴 상태였다. 코로나19가 큰 타격을 준 것이 맞겠으나 실제 백화점 운영과 관련한 경영진의 좋지 않은 일들이 이어졌고 방만한 경영의 결과가 결국 폐업을 결정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블랙기업이란 고용 불안 상태에서 일하고 있는 청년 노동자들에게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등 불합리한 노동을 강요하는 기업을 말한다. 일본의 청년들이 열악한 노동 현실을 알리기 위해 사용한 말로, 2013년 <블랙기업 - 일본을 먹어 치우는 괴물>이라는 책을 쓴 일본의 곤노 하루키가 저서에서 사용한 말이다. 저자는 블랙기업에 대해 '법에 어긋나는 비합리적인 노동을 젊은 직원한테 의도적 · 자의적으로 강요하는 기업, 곧 노동 착취가 일상적 ·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업'이라고 규정했다. 즉, 블랙 기업은 오직 회사의 이익만을 위해 비합리적인 노동을 젊은 직원에게 강요해 노동착취를 조직적으로 행하는 기업을 지칭한다(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언론기사에 따르면 태평백화점 직원들은 엄청난 저임금을 받으며 근무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직원들과 입점업체들이 쉴 만한 공간조차 없었으며 백화점 상품권을 직원들에게 강매하여 매출을 올린 것이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당해고와 매장 재계약 시 갑질 등의 일들을 수시로 자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고용노동부에 내부고발이 이어졌고 그것을 덮기 위해 그들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는 등의 노력(?)을 했으나 모두 '혐의 없음'으로 종결되었다고 한다. 이런 내용들만 보더라도 태평백화점은 엄청나게 심각한 블랙기업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내용들을 한참 시간이 흘러 폐업 이후 히스토리가 궁금해 찾아보다가 알게 되었는데 분명 우리 주변에 이런 일들을 겪고 있는 블랙기업의 노동자들이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1인당 GDP 35,000달러를 돌파해 선진국을 향해 가고 있고, 그에 따른 고용 및 노동 환경이 좋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대세인 것 같다. 하지만 일부 대기업 및 중견기업 직장인들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 나 역시 마지막 직장이었던 중소기업에서 4대 보험이 미납되어 대출이 막히는 피해를 본 경험이 있다. 퇴직금 미지급, 추가근무에 대한 수당 미지급, 육아휴직 등 직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만한 것들이 무시당한 채 일하는 모습을 많이 지켜보았다.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해도 피해자에게 합의를 우선적으로 종용(?)하는 일들이 꽤나 많음을 각종 블로그와 SNS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는 사이 젊은 직원들의 멘탈은 갈려나가고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의 목소리는 가중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결국 인재가 이탈할 수밖에 없는 노동환경을 제공하는 기업은 이익창출은커녕 존재하기 힘든 상황으로 이어지는 일은 자명할 것이다. 태평백화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