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시골마을에 타닥타닥 불이 타올랐다. 긴 겨울 소 먹이로 쓰기 위해 동네 한가운데 높이 쌓아둔 볏짚더미가 활활 타오른다. 동네 아이들 몇 명과 도시에서 온 소년을 비롯한 몇몇이 깜짝 놀라 도망쳤다. 잘 마른 볏짚은 순식간에 불의 탑이 되었고, '불이야' 소리를 들은 마을 어른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소년은 시골 친척집 사랑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쫑긋 세운체 잠에 든 척 연기를 한다. 시골 성묘길 고향에 들렀던 소년의 아비와 작은 아비는 불을 끄기 위해 볏짚으로 달려간다. 마을 주민들이 부지런히 물을 길어 날랐고 타오르던 볏짚도 어느덧 희뿌연 연기를 내며 불이 멎었다.
마을 주민들은 도대체 누구의 짓인지 시끄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범인을 알고 있었던 마을 아이들은 도시에서 온 소년이 한 짓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소년의 아비는 집 안에서 자고 있는 애가 그럴 리가 없다며 손사래 쳤다. 그럼 도대체 누구야? 라며 웅성거렸고 사랑방 안에서도 귀를 기울이고 있던 도시 소년은 눈도 뜨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인생 첫 방화였다.
그 이후에도 소년은 어린 시절 이상한 짓을 몇 번 하였는데 한 번은 다 먹은 훼미리 주스병을 아파트 복도에서 주차된 차들이 즐비한 동과 동 사이공간에 던졌다. 당시 아파트를 산책하던 사람이 맞았다면 살인미수였을 것이며 혹여나 차 위에 떨어졌다면 재물 손괴죄가 성립될만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근처를 지나던 사람이 떨어진 병소리와 파편에 깜짝 놀라 이를 경비원에게 알렸다. 그때 역시 소년은 집 안으로 들어가 이불속에서 자는 척을 했다. 하지만 소년이 주스병을 던지고 밖을 내다보았고, 떨어진 산산조각 난 병을 발견한 주민이 쳐다보는 바람에 아파트 6층에서 던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비원은 부랴부랴 6층의 각 호수를 방문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소년의 집에 다 달았다. 함께 지내던 외할머니는 문을 열어 주었다.
"이 집에 혹시 남자아이가 있나요?"
"네, 9살짜리 아이가 있는데 무슨 일 있나요?"
"6층에서 어떤 아이가 주스 병을 던져서 사람이 크게 다칠 뻔했는데 누가 했는지 찾고 있습니다."
"정말요? 그렇지만 우리 손주는 아까부터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아닐 거예요."
"아...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그럼 실례가 많았습니다. 쉬세요."
이번에도 운 좋게 넘어가게 되었다. 소년은 자신이 한 행동이 나쁜 짓임을 알면서도 묘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소년은 자라나 중학생이 되었고 큰 존재감 없이 지냈다. 몸집도 작은 편이었고 소극적인 성격에 반에서 공부는 중간정도 하는 아이였기 때문에 눈에 띌 일이 별로 없었다. 부모님 역시 공부를 잘하는 누나에게 더 신경을 썼기에 자연스레 부모로부터 관심을 피할 수 있었다. 소년은 그럴수록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자주 이상한 상상을 하곤 했다. 이블데드와 같은 B급호러 무비를 비롯한 잔인한 스릴러와 공포영화를 즐겨 보게 되었고, 양들의 침묵 한니발 렉터 박사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된 소년은 기숙학교에 보내졌고 더욱 혼자만의 시간이 늘어났다. 다양한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었으며 데스메탈을 즐겨 들었는데 점점 말수는 줄었고 수업시간과 잠을 자는 시간마저 귀에는 이어폰을 꽂은 채 삶을 이어갔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소년을 불러도 높은 볼륨으로 듣던 데스메탈 음악 소리 때문에 알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치곤 했다. 그러자 주변에서는 좀 특이한 아이로 취급하기 시작했고 별일이 없으면 특별히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이 더욱 늘어난 소년은 누군가와 적극적으로 소통하거나 생각을 공감하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졌다. 소년의 학창 시절이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