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년은 20살이 되었고 점수에 맞춰 집에서 좀 거리가 있는 경기도에 위치한 대학교에 들어갔다. 대중교통으로는 통학이 힘들 것이라고 부모님을 설득해 자취를 시작했다. 평상시에도 혼자 잘 지내는 모습을 본 부모님은 걱정 없이 청년이 된 소년의 출가를 허했다. 이상하게도 청년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5평짜리 자취방에서 이제야 진짜 보금자리가 생긴 것과 같은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혼자가 된 소년은 이상한 상상을 더 이어 나갔다. 그리고 학교에서도 늘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지냈는데 조금 달라진 것은 귀에 이어폰을 꽂긴 하였지만 시끄러운 메탈 음악을 듣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일종의 생존본능 같은 것이 작동했다.
대학교 신입생들이 그러하듯 모이면 소개팅, 남자 그리고 여자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청년은 대화에 끼어들지는 못했지만 이어폰 넘어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누가 누구랑 잤으며', '누가 누구랑 헤어졌는지' 등의 이야기를 엿듣곤 했다. 그중 같은 과의 한 여학생의 이야기에는 더 귀를 기울였다. 키가 작고 아담했으며 본인보다 1살 많았던 그녀는 중성적이지만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하얀 피부에 약간의 주근깨, 가지런한 입술과 살짝 튀어나온 광대뼈, 또렷한 눈망울은 '양들의 침묵'의 주인공 조디 포스터를 떠올리게 했다.
여학생은 동갑내기 체대생과 연애 중이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았던 체대생은 다른 여자들에게도 자주 추파를 던지는 그런 놈이었다. 어느 날 학생회관에서 여학생과 체대생이 큰 목소리로 싸우고 있었고 분위기가 격해지던 찰나였다. 체대생이 손을 번쩍 들어 여학생을 칠 것 같은 자세를 보이자 근처에 서 있었던 청년은 여학생 앞에 무작정 뛰어들어 손을 막았다.
"뭐야? 너 뭔데 끼어들어? 얘 세컨드라도 되냐?"
"아.. 아닙니다. 여..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선.. 배 님."
"뭐? 하 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던 남학생이 손을 내리고 씨발씨발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여학생은 청년에게 고맙다는 말도 없이 학생회관 문밖으로 뛰어갔다. 청년은 처음 해 본 이타적인 행동에 스스로 놀라며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그리고 자취방으로 돌아가 이유를 찾기 위해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왜 내가 그랬을까? 그녀를 좋아하나? 아니면 난 원래 이런 기사도 정신이 있는 놈인가? 여러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잠이 오지 않았다.
청년은 다음 날 학교 도서관 안에서 우연히 여학생과 마주쳤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멈칫거리더니 조용히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며 나가자는 입모양을 했다. 밖으로 나 온 청년과 여학생은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너 우리 과 1학년 맞지? 이름은 모르는데 널 본 거 같아. 어제는 고마웠어. 근데 이름이 뭐야?"
"아... 네. 선배님.. 제 이름은 김제문이에요."
"아.. 김제문. 근데 어제 왜 그랬어? 내 남자친구 성질도 더럽고 무서운 애인데 작고 왜소한 네가 그래서 좀 놀랐어. 너 괜찮은 거지?"
"네.. 괜찮아요. 근데.. 선배님은 괜찮으세요?"
"나? 나는 뭐... 괜찮아. 근데 그 새끼 정말 나쁜 놈이야... 아... 진짜 짜증 나."
청년은 전혀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한 사이였음에도 대화가 크게 어색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동질감이 느껴졌다. 흥미를 느낀 청년은 더 알고 싶다는 마음에 용기를 내 술 한 잔 하자는 이야기를 건넸고 놀랍게도 여학생이 거절하지 않아 바로 근처 냉동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너 근데 의외다. 평상시에 말 한마디 없어서 숫기 없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술도 먹자고 하고?"
"아.. 그냥 저도.. 선배랑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아직 과에 친한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용기 내 봤어요. 혹시... 부담스러우시면 꼭 안 드셔도 돼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의외라고. 나 솔직히 술 엄청 당겼거든. 어제 그 일도 있었고..."
"그럼 잘됐네요. 근데 이런 거 여쭤봐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어제 남자친구분 왜 그렇게 화가 나신 거예요?"
"아... 진짜 이거 정말...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저... 과에도 그렇고 이 학교에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없어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흠... 아... 나도 너무 고민되고 힘드니까 이야기하고 싶긴 하다. 실은 나 임신한 거 같아. 근데 그 얘길 했더니 그딴 식으로 굴잖아. 그 애가 자기 애라는 보장 있냐며. 그래서 욕했더니 손을 드네? 진짜 미친 새끼 아니냐?"
청년은 순간 흠칫 놀라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했다. 담담한 척하는 것도 이상하고 친한 사이도 아닌데 오버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러다 무심결에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아.. 그럼 제가.. 병원에 같이 가.. 드릴까요?"
"뭐?"
여학생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쳐다보다 어이없다는 듯이 막 웃어대기 시작했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너 되게 재밌는 애구나? 와하하하."
당황한 청년은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