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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3

소설

by 매버지

습작 #1

습작 #2


청년은 잠시 자신이 한 말에 문제가 있는지 생각했다. 원치 않은 임신이라면 빠른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최선이고 합리적인 게 아닌가? 그런 생각 중 단 한순간도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생명에 대한 고민은 들지 않았다. 웃고는 있지만 고민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여학생을 향해 말했다.


"제가 주제넘었다면 사과드려요.."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고 그녀는 큰 한숨과 함께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야. 어쨌든... 고마워. 근데 아직 테스트기도 제대로 해 본 게 아니어서. 나중에 정말 도움이 필요하면 말할게. 어차피 혼자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청년은 그녀의 비밀을 공유했다는 쾌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관계가 더 깊어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도 그러는 걸 원할지는 모르지만 청년은 더 많은 비밀을 그녀와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술집에서 나와 그녀와 헤어진 후 자취방을 향해 가는 동안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집 앞에 다다라서야 그녀의 전화번호도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욕이 튀어나왔다. 이런 등신.


그 일이 있은 다음 날부터 계속 학교 여기저기를 떠돌며 그녀를 찾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설마 그 남자친구한테 무슨 해코지라도 당한 건가. 아니면 자기한테 이야기한 게 너무 쪽팔려서 그런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녀가 보이지 않자 더욱더 애가 닳았는데 하마터면 그녀와 함께 다니던 무리의 여학생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을 뻔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남자친구 역시 학교에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워낙 시끄럽게 떠들고 다니던 녀석이라 안보일리는 만무했다. 학과사람들이 그 둘에 대해 쑥덕거리는 걸 들어보니 '헤어졌는데 안 좋게 헤어졌다, 남자친구가 폭력을 행사한 거 같다' 등의 이야기를 하였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녀에게 뭔가 큰 문제가 생긴 게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 잠을 못 이루는 날을 이어가던 밤 문자 한 통이 왔다.


나 윤가을이야. 너랑 술 마신. 너 혹시 오늘 저녁 8시에 지난번 같은 장소에서 만날 수 있니?


아니,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지? 너무 놀랐지만 정말 반가웠다. 그녀는 살아 있었고,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이효리의 노래가사처럼 먼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정이 벅차올랐고 어떤 이야기나 부탁도 다 들어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약속장소로 나갔다.


그녀는 먼저 와 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실내에 어울리지 않는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청년이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며 그동안 학교에서 안 보여서 걱정했다고 말하자 그녀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더니 양쪽 눈에 가득한 멍을 보여 주었다. 옷깃으로 가려진 목과 팔에도 상처가 조금씩 엿보였다. 청년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지만 속으로는 분명 그 쓰레기 같은 남자친구의 짓일 거라 확신했다. 개새끼.


"눈 보고 놀랐지? 좀 다쳤어. 그래서 학교도 못 갔고. 이제 좀 괜찮아져서... 잘 지냈어?"

"네.. 저야 뭐.. 근데 선배님 많이 다치신 거 같은데 무슨 일 있으셨던 건가요?"


살짝 눈물이 고인 눈으로 잠시동안 청년을 쳐다보던 그녀가 알 수 없는 뚜렷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앞으로 펼쳐질 이상한 일들을 암시하고 있었다. 지금껏 청년이 해 온 이상한 상상들을 충분히 현실로 연결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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