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너만 알고 있어야 해. 너는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을 거 같아서 말하는 거야."
불안과 확신에 찬 눈으로 청년을 바라보며 그녀는 말했다. 청년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에 이미 그는 기분이 좋았다. 고개를 숙이고 잠시 숨을 고르던 그녀는 다시 뚜렷한 미소를 지으며 청년에게 말했다.
"나 실은... 너랑 술 먹은 그날 집 앞에서 남자친구한테 맞았어. 근데 얼굴만 때린 게 아니라 내 배까지 때려서 잠시 쓰러져 정신을 잃었는데 눈 떠보니 병원이더라. 의사가 유산했다고. 이미 남자친구가 병원비는 계산했다며..."
청년은 자기 예상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그놈은 개새끼다. 순간 웃음이 새어 나와 버렸다. 아차.. 이럼 안되는데... 청년은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짓을... 지금 몸은 괜찮아요? 그 사람은 그 후에 만나 보셨어요?"
"그 개자식은 그날 이후로 잠수를 탔는지 연락도 안되네. 그냥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할까 봐."
"신고...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데이트 폭력.. 뭐 이런 거로요."
"그럼 그놈은 더 미친 짓을 할지 몰라. 그냥 이렇게 넘어갈래."
청년은 그녀의 눈빛이 더 할 말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반도 못 먹은 삼겹살이 불판 위에서 시커멓게 타고 있었다. 시커먼 돼지고기를 보며 그녀의 남자친구를 태워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화형을 시키리라.
청년은 오늘도 그놈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며 그녀의 집 앞까지 함께 갔다. 버스를 타고 30분쯤 가서 내린 후 조금 걸으니 한적한 전원주택 단지가 나왔다. 드문드문 보이는 집들 중 불이 켜져 있는 집을 찾기가 어려웠다. 관리가 좀 안 되는 단지처럼 보였다. 가로등이 간간이 비추는 인적이 드문 길을 지나 길 끝에 다다르자 그녀의 집이 나왔다. 꽤 크고 외벽이 높아 내부가 잘 보이지 않는 그런 집이었다. 회색빛 대문 앞에 서자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오늘 진짜 고마웠어. 이상하게 너한테 말하고 나면 편하더라. 집까지 바래다준 것도 고맙고. 나 이제 들어갈게."
"아니에요. 근데 이 동네 여자 혼자 다니기는 좀 위험한 것 같네요. 혹시 집에 늦게 가시기 무서울 때면 저 부르세요. 제가 같이 가 드릴게요. 저 혼자 자취하고 있어서 늦게도 괜찮아요."
"아휴 집도 먼데 어떻게 그래. 그냥 마음만 받을게. 고마워. 너무 늦었다. 어서 가봐."
청년은 키로 회색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녀를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열리는 대문 사이로 불 꺼진 집 앞마당이 살짝 보였는데 초록빛의 잔디가 아닌 검은흙들이 여기저기 파인 흔적이 보였다. 부모님이 마당에 농사라도 지으시나. 청년은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대문이 닫힐 때까지 계속 쳐다보았다. 철커덩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닫히고 현관문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구두소리만 들렸다. 잠시 뒤 '끼익'하고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청년이 그제야 뒤돌아 걸으려 하는데 그때 작지만 또렷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녀가 읊조렸다.
"시발 이 새끼. 아직도 살아있네?"
청년은 순간 발이 굳었다. 뭐지, 내가 지금 들은 게? 아직도 살아있다니? 청년은 두렵지만 호기심 어린 두 눈으로 뒤돌아 그녀의 집을 바라보았다. 을씨년스럽던 외벽 위에 달린 깨진 유리조각들이 달빛 아래서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순간 청년의 눈에 비친 그녀의 집이 마치 양들의 침묵의 최종보스 '버팔로 빌'의 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 확신에 찬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그녀의 집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빨간색 초인종을 누르자 잠시 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저예요, 선배. 김제문."
"뭐야, 너 아직 안 갔어? 무슨 일이야?"
"저 혹시... 선배 도울 일 있을까 해서요."
잠시 동안 정적이 흐른 뒤 밝은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들어와."
삐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회색대문이 열렸다. 쇠가 바닥을 긋는 마찰음과 함께 조금씩 검은 앞마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계단 위 현관문이 열리면서 주황빛 조명 아래 그녀가 검은 앞치마를 두른 채 나왔다. 한 손에는 톱을 든 채로. 그녀가 뚜렷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봤네. 어서 와, 환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