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찬주의자
제목은 배려라고 썼지만 내게 있어 배려는 남에게 피해주기 싫은 마음이다. 배려심이 깊다는 것은 좀 더 많은 대상에게 보다 넓은 아량으로 상대방을 먼저 위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 나의 배려는 많이 소극적이며 매우 제한적이다. 하지만 제목을 피해주기 싫은 마음이라고 쓰려고 하니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챗대리에게 물었다. 그 결과 남에게 피해주기 싫은 마음도 넓은 의미로 배려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좀 더 수월히 그냥 '배려'라고 제목을 적고 피해주기 싫은 마음에 대해 글을 적는다.
언제부터 난 피해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게 되었나? 아마도 꽤 어린 시절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유교를 잘못 인식하셨던 할아버지께서 자신의 아들에게는 자식 된 자의 도리를 강조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낳은 손자에게는 한 없이 관대하였으나 예절을 강요하며 집안의 종손으로서 늘 베풀고 양보하는 마음을 강조하셨다. 그 덕분인지 나는 내 것을 못 챙겨도 남의 것을 챙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채 어린 시절을 지냈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이 쌓여 성인이 되어서도 항시 집안 동생들이나 친척 어른들을 챙기는 일(타지에 살지만 자주 문안 전화를 드리거나, 고향에 내려가면 방문하고 인사를 하는... 조선시대.... 아닙니다...)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런 할아버지를 극도로 미워하셨던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가스라이팅의 여파인지 유교보이(?)적 행위의 일부를 여전히 나에게 강요하실 때가 있다. 이젠 세상물정을 조금 알게 된 나는 극렬한 반론을 제기하기 때문에 어머니께서는 예전보다 많이 자제하시게 되었다. 나는 배려로 가장한 쓸데없는 챙김과 그런 것들을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 혹은 문화가 너무 싫다. 그래서 이젠 정말 챙기고 싶은 사람만 내 여력하에 챙긴다는 마음으로만 살고 있다.
글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하고 싶은 말은 나는 누군가에게 피해 주는 일이 싫다는 것이다. 반대로 누군가가 내게 피해를 주는 일은 더더욱 싫다. 특히 자신의 이익 또는 목적 달성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미치는 인간을 볼 때면 화가 치민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그런 심보가 더욱 강해졌다. 예를 들면 아이와 함께 지나다니는 아파트 단지 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땐 워리어나 헐크호건이 된다.
"여기는 금연구역입니다. 아이들도 지나다니는 아파트 단지 내에서 담배를 피우시면 어떡하십니까?"라고 던진 후 계속 쳐다보면 10명 중 8,9명은 담배를 끄거나 죄송하다고 말하며 아파트 단지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가끔 강적을 만나는데 '왜 여기서 피우면 안 되냐'는 사람(아파트 단지 전체가 금연구역인지 모르는..)과 '왜? 네가 뭔데'를 시전 하는 사람이다. 전자는 논리나 정보전달로 설득이 가능하지만, 후자는 논리로 해결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다 여기서 핀다. 왜 나한테만 이러느냐'라는 대답을 들으면 '그 사람의 행동이 맞다고 생각하냐?'라고 반문하며 과거의 나로 돌아가 '백 분 토론'을 시작한다.
또다시 글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최근에도 피해를 주기 싫어하는 에피소드가 생겼다. 예전보다 할 수 있는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을 걸러내는 내공이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실수를 저질렀다. 친분과 나의 잘못된 메타인지 때문에 덜컥 큰 규모의 컨설팅 용역을 맡아 버린 것이다. 나를 외주 용역의 핵심인력으로 쓰고자 한 사람은 과거 나의 업무성과에 대한 데이터는 있고, 이런저런 곳에서 구르며 경험한 것들이 꽤 있어 인사이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한 부분은 내가 지금 육아와 병행하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지금껏 일을 하며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이다. 물론 과거에도 일을 하며 아이의 등원을 담당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아내와 철저한 분업화로 본업에 큰 지장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지난 1년 동안 육아와 집안일의 90% 가까이 내가 수행하며 전업주부로서 살아온 지 1년이나 되었다. 아이의 등원 전부터 등원과 하원, 그리고 이후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내 역할이 중요해졌다. 지난 1주일 용역업무를 맡아서 하며 생각보다 나의 집중력과 체력은 약함을 느꼈고, 그로 인해 육체적 피로는 물론 내 업무과정과 성과에 만족이 되지 않아 정신적 피로까지 극심해져 버렸다. 결국 갑으로서 컨설팅 사를 경험해 본 바 내가 을로서 그만한 보상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을 지새워 일을 해도 그들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미팅을 진행하거나 출장을 다닐 수가 없다는 것이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나 없나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과물의 질과 상관없이 과정에 100%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피해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짙어진 것이다. 마음이 매우 불편했다.
이 와중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쫓겠다고 지금 외부 특강을 들으러 왔다. 욕심이 지나친가? 나를 용역으로 고용한 회사입장에서 알게 되면 속상할 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할 일을 안 하고 온 건 아니다. 어젯밤, 오늘 새벽과 오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을 처리해서 공유했다. 저녁에 미팅까지 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 또한 피해를 주고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도대체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모르지만 결국 결과물에 대해 내가 책임지면 된다는 내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피해 주지 않는 삶과 관련한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피해를 주지 않는 일과 오지랖을 부리는 일을 구분해야 한다. 오지랖이란 '옷의 앞자락, 한복의 겉옷에서 앞부분이 넓게 퍼진 부분'을 뜻한다고 한다. 이에서 확장되어 '자기와 직접 관련 없는 일에 지나치게 나서는 것'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내 상황에 있어 오지랖이란 내 업무와 관련해 해야 할 일을 하고 충분히 대응하고 있음에도 그 외의 일(좀 더 업무 주변상황을 훈훈하게 만드는...)들을 해낼 수 없음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난 현재 쓰리잡이다. 아빠이자 남편(가족), 주부(집안일과 육아), 용역 용병(경제활동)이기 때문에 세 가지 롤에 있어 배분이 필요하다. 그걸 넘어서는 건 오지랖이다. 그걸 인정하고 이해해야 하며 쓸데없는 부분을 적절히 쳐내야 한다.
바쁘지만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요즘 예찬주의자를 연재하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이런 정리의 시간을 통해 고민을 해결하고 또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다. 덕분에 내가 예찬하는 배려(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를 꾸준히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혹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른다. 배려함에 있어 당신은 완벽주의자가 될 필요가 없다. 당신의 상황에 맞춰 당신의 에너지를 분배하며 당신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배려한다면 그 삶은 훨씬 풍요로워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