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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기자 Jan 01. 2020

화양연화

Adios, 2019

어릴 때 '동물의 왕국' 같은 다큐멘터리를 보는 걸 좋아했다. 슬로모션으로 사바나를 달리는 치타를 보는 게 즐거웠다. 가죽 아래 용수철 같은 다리 근육이 터질 것 같이 팽창과 이완을 반복했고 호랑무늬가 달릴 때마다 넘실넘실 춤을 췄다. 치타는 초속 29m(!)로 질주해서 사냥을 하는데 그 순간을 위해 하루 종일 누워서 일종의 재장전을 한다고 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난 내가 치타형 인간이라 생각했다. 지구력이 약하고 단타에 강한 편이라


그리운 헬싱보리 기숙사. 2년간 날 지켜본 증인이자 동고동락한 이 장소가 지금도 많이 그립다.


새해 목표는 세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솔직히 고백하면 2020년은 철저하게 농땡이 치는 게 목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미 저질러 놓은 프로젝트가 2개나 있어서 일단 내가 싼 똥은 치워야 하기 때문에 내년은 이 두 가지에만 집중하기로 하고.. 그 외 직장 일, 스웨덴어 등 어학, 커리어를 위해 배우려고 했던 것 등은 죄다 휴대폰 계획란에서 밀어버렸다.



지난 몇 년간 전속력으로 달리는 치타 모드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뭔갈 이루면 그때마다 멈춰 쉬어야 하는데 그렇질 못 했다. 특히 비자 문제가 해결된 10월에는 무슨 뽕 맞은 사람처럼 과다흥분 상태였다. 하루 2시간씩 자도 정신이 명료하고 힘이 넘칠 정도로 과흥분 상태였고 뭔갈 계속 더 하고 싶고 지치질 않는 그 상태에 도취돼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마음 한 구석으로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는 거다.. 이 짓을 안 하려고 스웨덴에 왔는데 여기 와서까지 이러면 뭔 의미인가.. '한국인'이라는 직업이 너무 힘들어서 여기 온 건데 계속 사냥하는 치타 모드를, 그것도 장기간 유지하려는 건 심하게 모순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단의 대책으로 최근엔 안 보던 소설책을 꺼내 들었다. 10, 20대엔 소위 돈 안 되는 문학류에 빠져 살다 직장 들어간 뒤론 실용서만 읽은 것 같다. 특히 최근 4년간은 소설이나 인문서적을 읽는 시간이 아까웠는데 어젠 '로재나 (Roseanna)'를 펼쳐 들었다. 유학 전 사놓고 왠지 죄책감이 들어서 읽진 못하고 갔던 책들 중 하나다. 몇 년 만에 소설책을 읽는 자기 모습이 처음엔 무지 어색했는데 다행히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장강명 작가의 '한국이 싫어서'를 다시 읽었는데 여전히 공감 가는 대목이 많았다. 몇 년 전에 봤던 '홈랜드', '디 아메리칸즈' 등 스파이물 미드들을 다시 보고 있다. 홈랜드는 "캐리 이 미친년!" 하면서 계속 보게 되는, 아침드라마 같은 맛이 있다.



스웨덴 & 덴마크 합작 드라마 중 '그레이존(Grey Zone)' 이란 작품을 아버지가 추천해 주셨는데 재밌었다. 작중 배경이 코펜하겐 공항과 시내, 스톡홀름, 스카네 등 익숙해선지 반가웠다. 심지어 범죄 타깃이 되는 여주가 룬드대 출신 드론 공학자다. 같은 룬대생(?) 기계공학과 동문이었던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된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포스팅하고 싶은데 그 포스팅은 왠지 나와 아버지만 볼 것 같은 예감이ㅋㅋ 내친김에 프레드릭 포사이스 (영국 첩보물의 대가. 전직 기자였는데 과거 특파원으로 파견된 나라에서 냉전시대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훗날 자신의 책에 털어놨다. 그래선지 그의 걸작들을 보면 역시 직접 체험을 이기는 취재는 없다는 걸 증명하는 듯하다), 제임스 패터슨, 레드먼드 챈들러도 하나둘씩 꺼내 읽기로.



지인들이 비자 만료 전에 취뽀했다는 소식들이 어제, 오늘 계속 들려오면서 모처럼 훈훈한 연말을 맞고 있다. 석사 때 절친 2명이 있었다. 우리끼리 늘 밥 같이 먹고 차 마시고 수업 듣고 시험공부하고 놀러도 가고 가십도 즐기곤 (ㅋㅋ) 했는데 그중 남자애 한 명은 졸업하고 자국으로 돌아가 아쉬웠지만 (우리 셋 중 제일 먼저 취업했다. 스위스 NGO에) 다른 한 명인 중국인 동생이 취뽀를 해서 스톡홀름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너무 기뻤다. 이 여인네의 경력이 중국 기업 인사과에서 일한 게 전부라 그냥 해외취업도 힘든 마당에 얘도 나와 마찬가지로 외국에서 전직을; 해야 할 판이었기 때문에 사실 많이 걱정했었는데 보기 좋게 붙어버리심(역시 될놈될) 내년에도 이 여인을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쁘다. 성격 진국인 스페인 친구 녀석은 헬싱보리에 잘 정착해서 일하고 있고 내년에 이사 간다고 씐나 있었다. 친척들을 뵙다가 사촌 2명이 해외에서 취뽀하고 영주권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끄럽지만 그동안 먹고사는 게 바빠 어른들께 연락도 뜸했고 여자 사촌들이 둘이나 외국에 있었는지도 처음 알았다. 한 명은 캐나다에 정착했고 다른 한 명은 최근 미국에서 취업 영주권 스폰을 받았다고 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동생을 봤을 땐 진로 고민을 하던 고등학생이었는데.. 축하도 축하인데 어린 녀석이 그동안 타지에서 혼자 얼마나 맘 졸이고 비자 문제로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장하고 멋지고 대견하기도 하고 울컥했다. 스웨덴이나 다른 유럽에서 취업비자 따는 것도 어렵다지만 솔직히 미국에 비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차원이 다른 빅리그라.. 더군다나 트럼프 정부 밑에서 이걸 해내다니 대단한 녀석.. (Grace, 네가 가는 모든 길들이 순조롭고 아름답길) 이모 내외가 30여 년 전에 호주로 이민을 가셔서 이민 2세대인 외사촌 오빠들이 있었는데 한 명은 미국으로 재이민을 가서 언니, 귀여운 조카와 예쁜 가정을 이뤘고 작은 오빠는 뉴질랜드로 가서 산 게 벌써 2년째라고 한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새 식구들도 생기고 많은 변화가 생겼다. 올해엔 작은 오빠가 좋은 배필을 만나 정착하기를 이모도 나도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주세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들 잘 풀리고 그중 몇 명은 근거리에 남게 된 것도 복인 것 같다. 알고 보면 내가 취업에서 가장 도움을 많이 받고 나도 역으로 다른 사람들 채용을 도와줬던 곳도 지역 네트워크였다. 도시들이 다 마찬가지지만 헬싱보리는 정말 뜨내기들의 도시라 외국인들끼리 결속력이 강하고 끈끈했다. 느낌상 웁살라, 스톡홀름은 인터내셔널한 느낌인 반면 남부(Skane) 쪽은 외국인들끼리 뭉치는 경향이 강했고 외국인 네트워크가 아주 탄탄했다. 한국인들이 말하는 情을, 난 스카네에서 많이 느꼈다ㅜㅜ 그래서 떠나왔지만 거기 남겨두고 온 사람들을 잊을 수가 없다. 특히 SFI 학원에서 만난 진국 같은 언니 오빠, 친구들은 내가 평생 가져갈 인연이라 생각했는데 다들 밥벌이 때문에 직장 근처로 뿔뿔이 흩어지고 이사 가고 차츰 멀어지는 그런 운명들이라 안타까웠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절친의 취뽀/이사 소식은 감회가 남다르다.



아버지와 간만에 친척들을 화제 삼아 이런저런 이야길 대화를 나눴다. 긴 대화 끝에 가족 모두 대체로 운이 좋았고 위기를 그때그때 원만하게 극복해 왔다는 조금은 엉성한 결론에 다다랐다. 보통 이런 대화를 잘 나누지 않는데 아마 연말이라 옛날 생각이 나신 모양이다. 나에게는 2019년이 최고의 해였다. 올 한 해 정말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다. 석사 졸업, 취직, 확진과 수술까지. 10대 때부터 꿈이었던 유학과 해외 취업이 올해 다 이뤄졌고 인생 전환기라 할 만한 사건도 2건 있었다. 3월 추운 기숙사 방에서 프렌치 몬타나의 'Unforgettable'을 들으면서 논문을 쓸 때 꼭 아버지를 위해 이렇게 되리라! 고 했었는데 진짜 unforgettable 한 한 해가 됐다.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아버지를 위해 그 논문을 썼던 것 같다) Unforgettable은 French Montana가 미국 이민 1세대인 모로코인 부모님을 생각하며 만든 노래. 그런 것치곤 가사가 너무 세속적이긴 하지만 자기 뿌리를 잊지 않고 모국에 대한 자부심을 예술로 승화시킨 이 가수와 뮤직비디오가 참 맘에 든다)



한 해의 마지막, 31일인 오늘에도 2019년의 손을 놓아주기가 힘들고 마냥 아쉽다.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2019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쩌면 걸어온 매 순간이 화양연화이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밤바다에 홀로 켜진 등대처럼 석사 논문을 썼던 춥고 그리운 기숙사, 'Södergatan 97'. 주말과 방학 때 즐겨 찾던 카페들과 헬싱보리 도서관, 아침 9시 수업 시작 전이면 캠퍼스 강의실에 내려앉던 그 냉한 공기와 은은히 퍼지던 커피 향. 가끔 그립지만 그렇다고 절대 돌아가고 싶진 않은 이전 회사 다닐 때의 힘들었던 기억들, 살면서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맞닿뜨려야 했던 녹록지 않았던 고비고비들이 이젠 소중한 추억이 됐다.



돌이켜보면 걸어온 걸음걸음이 축복이었던 것처럼. 2020년, 그 뒤로도 매사에 감사드리고 순간순간을 화양연화로 만들어 나가고 싶다.



프렌치 몬타나의 말대로, '잊지 못할(unforgettable) 성취'를 계속 이뤄 드리겠노라고.




프렌치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모로코에서 찍은 부모님의 결혼식 사진을 올리면서 이 곡의 제목에 관해 다음과 같은 포스팅을 남겼다. “전 영어를 전혀 몰랐어요. 어려웠고요. 전 뉴욕의 상류층으로 이사 오는 건 줄 알았는데 남부 브롱크스의 뒷골목에 살게 되었죠. 그래도 모로코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어요. 아버지는 힘든 시간을 보내셔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그곳엔 아무 기회가 없다는 걸 알고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셨죠.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머니는 많은 희생을 하셨어요. 우리가 잘 먹고 잘 자라도록 초과근무를 하셨죠. 전 엄마에게 약속했어요. 기회를 잡으면 제가 열심히 일해서 '잊을 수 없는' 성취를 이루겠다고요. 열심히 사는 다른 사람들도 알았으면 해요. 하늘은 한계가 없다는 걸요. 여러분들도 '잊을 수 없는' 것들을 할 수 있다고. 그런 의미에서 제 노래 Unforgettable을 선사해드려요.”

Unforgettable – French Montana Feat. Swae Lee / 2017 written  by 현지운


https://youtu.be/CTFtOOh47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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