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camouflage의 계절
"일본, 중국, 한국, 홍콩... 내 생각엔 한국인이 옷을 제일 잘 입는 것 같아"
몇 달 전 '옷차림으로 출신 국가를 분간할 수 있는가'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중 친구가 내뱉은 말이다. 이 친구는 중국 상해와 북경, 홍콩에서 일을 한 적이 있는 헝가리인이다. 순간 100% 공감하기 힘든 마음에 '넌 나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라고 반박하려다가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뒤에 따라 나온 말이 문득 마음을 앗았다.
코리안들은 여기, 스웨디쉬들처럼 입더라. Black으로.
내 주변에 노홍철 씨처럼 입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다 그런 건 아니라고 친절히 정정해 줬지만 마침 나도 왜 스웨덴 사람들이 검은 옷을 선호할까 의문이 들던 차였다. 이쪽 사람들이 검은 옷을 즐겨 입는다는 소리는 여기 오기 전에도 직간접적으로 듣긴 했지만 막상 눈으로 거리 곳곳을 활보하는 닌자 같은 차림새들을 처음 봤을 땐 '어디 교회에서 장례식이 열렸나?''밤에 뭐 (훔치러) 가시나' 생각이 고작이었다
기본적으로 스웨덴 사람들의 옷차림에 대한 평판은 일부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내로라하는 패션 강국에서 온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미국이나 다른 유럽에서 온 친구들 사이에서 대체로 후한 편이었다. 꾸미지 않았는데도 정갈하고 무심한 듯 세련한 느낌. 플립플롭을 끌고 학교에 가는 문화권에서 온 학생들 사이에서는 잘 차려입은(?) 스웨덴의 교정 풍경이 상당히 색다른 인상을 줬던 것 같다. 잘은 모르지만 내가 대학을 다니던 무렵 교환학생을 왔던 중국인 친구가 "왜 한국 여자 대학생들은 다 화장하고 힐을 신고 학교에 오니"라며 놀라워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 아닐까.
그중에서도 블랙 홀릭에 대한 인상 평이 지배적이었는데 지난 8월 중순 개강 전 열린 오리엔테이션 행사에서 가진 '재학생들과의 만남' 시간에서도 어김없이 화젯거리로 올랐다. Q&A 시간에 어떤 학생이 2학년 학생들에게 "왜 스웨덴 사람들은 검은 옷을 많이 입느냐"는 질문을 던졌는데 그때 스웨덴 여학생 답변은 이랬다.
"글쎄? 스웨덴 사람들이 검은 옷을 왜 입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러고 보니 나만 해도 옷장을 열면 다 검은색이라 엄마가 뭐라 하긴 해(웃음) 친구들과 만나자고 하고 모이면 약속이라도 한 듯 다 검은 옷을 입고 모여서(웃음) 사실이긴 한데.. 음 편해서 그런 거 아닐까?"
그래서 생각난 김에 왜들 그리 검은 옷을 입는지 주변에 수소문해 보기로 했다. 아래에 쓴 소위 '흑의의 민족'에 대한 분석 글은 주변 스웨덴인들에게서 주워들은 의견과 내 생각이 섞여 있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일반화하긴 어려워 보인다. 긁적인 사견에 불과하다.
보호색
뒤에 포스팅을 할 예정이지만 건물 외관이나 명패, 인테리어도 절제되고 은폐성이 강한 느낌이 들었는데 옷차림에서도 그런 특성이 드러나는 걸까. 얀테의 법칙('너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거나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마라'로 요약되는 스칸디나비아 국가군 저변에 깔린 사회적 분위기 또는 정서)이나 라곰(더도 덜도 말고, 적당한 수준을 최선의 덕목으로 보는 스웨덴식 가치관)이 그냥 나오는 말이 아니듯이, 남들 눈에 튀지 않기 위해 철저히 무채색 속에 자신들을 은폐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스토익하고 경건한 청교도들의 옷차림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역사적인 내력이 있다고 봐도 되는 걸까? 그들 조상인 프로테스탄트들이 목깃까지 꼭꼭 여며 입은 검은 옷을 입었던 것은 종교적인 이유에서였겠지만 그때의 금욕적인 전통이 아직까지 내려온 것은 아닐 테고 그저 패션에 불과한 건 아닐는지.
그런데 의외로 주변의 많은 스웨덴인들이 '수줍음을 많이 타고 가급적 눈에 띄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해서'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에이, 그게 말이야 방구야? 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실제로 그런 기사가 나와서 당황했다. (Vice.com 패션잡지 참조)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의 답변인즉, 부끄러워서. (검은 옷을 입으면) 안전하다는 느낌에. 무리에 섞이는 기분이 들어서.
미니멀리즘
얼마 전 어떤 블로거가 스톡홀름을 '런던의 깔끔한 버전'이라고 묘사한 글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갔을 때도 거리가 정갈하고 정돈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중, 줄리아 로버츠가 친구들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스톡홀름을 묘사하는 단어로 'Conform'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런던의 경우, Stuffy라는 단어를 썼던 걸로 기억한다) 수도인 스톡홀름은 그나마 번잡한 느낌이라도 나지만(그렇다 하더라도 언감생심 런던식 번다함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고 생각하지만) 스웨덴의 다른 도시들은 최소한의 장식적 효과만을 허용한 인상을 줄 만큼 절제된 느낌을 받았다.
그 특유의 심플함이 옷차림에도 반영되는지 검은색으로 통일한 복장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앞서 인용한 잡지에서도 미니멀리즘을 이유로 든 인터뷰이도 있었다. 믹스 매칭을 하기 쉽다는 실용적인 이유를 들면서.
색깔이라도 침침하면 소품이나 디자인이라도 튈 법한데 그마저도 무난하다. 그나마 젊은 층들 사이에선 '브랜드'로 튀려는 시도가 엿보이긴 한다. 그런데 소위 그 '브랜드'라는 아이템도 당연히 검은색이다. 게다가 고가의 명품도 아니라 '나이키' 이런 식이었던 것 같다. 한데 워낙 다른 디자인적 요소가 모노톤에 절제되다 보니 특정 브랜드가 눈에 확 들어올 정도로 튄다면... 그 패션은 성공한 거라고 봐도 무방한 걸까.
패완블, '패션의 완성은 블론드다'
스웨덴뿐만 아니라 덴마크에 갔을 때도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봤다. 그래서 블랙 홀릭은 비단 스웨덴에 한정된 현상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이쯤 미쳤을 때 얼핏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으니, 그들의 금발이었다. 사실 검은 옷을 즐겨 입는 사람들이야 프랑스나 독일 같은 서유럽에도 많지만 유독 눈에 두드러지게 하는 건, 개인적인 생각으론 저 금발 때문이 아닌가 싶다.
다른 국가에 비해 금발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북유럽에서 사람들이 올블랙으로 입을 경우 금발이 더 두드러지는 것 같다. 특히 채도가 높은 봄이나 여름보다 사위가 어두운 겨울에 검은 옷을 온몸을 칭칭 감쌌을 경우 금발이 포인트를 주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내는 것 같다.(거기다 거리가 순백의 눈으로 덮였다고 생각해 보라. 블랙&화이트, 심플함의 극치다) 아마 그들도 그걸 아니까 저런 식의 미니멀한 연출을 하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물론 흑발, 진저 헤어의 스웨디쉬들도 마찬가지로 블랙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본 최고의 블랙 패션은
1) 금발에 검은색 목도리, 검은 장갑과 점퍼, 검은 목티를 입고 양 무릎이 한 일자로 찢어진 블랙진까지 야무지게 챙겨 입은 뒤, 마지막 신발은 무광택 진갈색 스웨이드를 신은 차림새였다. 마치 금발과 신발이 수미쌍관을 이루는 느낌이랄까. 아 금발, 신발 라임마저!
제일 무난한 차림새로는 2) 금발서 블랙진까진 같은 프로세스로 내려오다가 브이자 로고만 흰색이고 신발끈까지 올 블랙인 검은색 나이키 (정말들 좋아하는 듯. 학교에서도 단골로 보는 신발이라 이젠 교복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다)로 끝마무리하는 스타일. 이건 길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듯하다. 그만큼 조금은 개성 없고 식상해 뵈기도. 3) 그밖에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올블랙에 밑창만 흰색인 운동화를 매칭하거나 4) 검은 상의에 청바지를 입을 경우 신발 줄까지 순백인 운동화를 신는 경우도 전형적이다.
무나니즘 (=실패 확률이 낮아서)
무나니즘에 대한 설명은 내가 지난 8월 중순 헬싱보리 공립도서관의 카페에 처음 갔을 때 이야기로 설명이 가능할 듯하다. 스웨덴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어벙했을 그 무렵 아무 생각 없이 점원에게 "아메리카노"라고 주문했더랬다. 지금도 그때 알바 점원이었던 친구 V는
"니가 아메리카노.라고 한 순간부터 오호라, 얘 한국인이구나 하고 알아봤지 갤갤갤ㅋㅋ 보통 (노멀) 커피라고 하는데 아메리카노라고 주문하는 건 한국인밖에 없거든"하면서 가끔 놀리곤 한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거나 한국에 여행을 가도 그렇게들 아메리카노를 많이 시키는데 한국인이 아메리카노를 유독 좋아하는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의 내 답변은
1. 제일 싸서
2. 무난해서. 실패 확률이 낮아서
3. 다들 많이 먹으니까
4. 전에 먹던 거라
5. 맛있어서
6. 그냥 (관성이 돼서), 였는데
아마 '왜 스웨디시들이 깜장 옷을 좋아하나'라는 질문에도 1을 제외한 저 나머지 답변들을 대입 적용시킬 수 있을 듯하다. 아니면 그냥 단순히 스웨덴 사람들이 검은 옷을 좋아하는 걸 수도 있다. 내가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것처럼. 이제 눈에 익어서 일 수도 있겠지만 외국인인 내 눈에도 검은 옷을 입었을 때의 스웨디시들이 가장 멋져 보이기도 했다. 오늘도 올블랙으로 차려입은 사람들을 거리에서 지나칠 때마다 그들이 온몸으로 웅변하고 있는 듯하다. '블랙은 언제나 옳다'고.
환경지리적 요인(북극권 고위도 + 암울한(?) 날씨)
사실 가만히 보면 2.3.4.5.6 모두가 다른 듯하면서도 같은, 무나니즘의 추구라는 동일선상에서 나온 답변들이다. 어쩌면 저런 무나니즘이 취향이 되고 습관으로, 또 체질에 가깝게 굳어지면서 악천후에 선택과 고민이라는 불필요한 노동과 소요되는 시간을 최소화해 주는 장점도 있을 것이다. 옷도 날이 좋아야 입을 맛이 나는데 추워 죽을 것 같은 날씨거나 허구한 날 비가 내려 기분이 더러운 날이 연속된다면 옷의 색감, 감촉, 뽀대 같은 디자인적인 측면은 후순위가 될 것이 자명하다. 그럴 때면 보온성과 실용성을 우선 따지게 되는데, 칼라는 매칭 하기도 만만찮고, 무엇보다 귀찮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럴 기분조차 나지 않는 날씨라면? Black이 답이라는 것.
오후 3시면 일찌감치 해가 지는 북유럽의 추운 겨울날 새벽, 어두컴컴한 방 한구석에서 '시꺼먼' 옷이 가득한 옷장을 더듬어 '새카만' 옷을 꺼내 입고 눈을 비비며 아직은 '컴컴한' 거리를 나서는 스웨디쉬들을 머릿속에 상상해보자...
*본문 사진은 헬싱보리(Sweden)‧헬싱외르(Denmark) 시내에서 촬영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