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女자

잉그리드 버그만 / "Play it, Sam"

by Kim기자

"연주하세요, As time goes by를... "


영화 '카사블랑카(1942년작)'를 떠올릴 때면 늘 회자되는 명장면이 있다.

여주인공 일자가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한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선다. 카페 주인인 릭과는 한때 파리에서 만난 연인 사이였지만 나치 독일이 파리를 점령한 뒤 그들의 사랑도 끝이 났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릭이 일자에게 마르세이유로 함께 도망가자고 했지만 정작 그녀는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 같은 여성이 세월이 흐른 뒤 불쑥 나타나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며 지하조직과 통하고 있는 릭에게 망명하게 도와 달라며 애걸한다. 체코인 레지스탕스 남편 빅터를 대동한 채...


둘 사이의 일을 잘 아는 피아노 연주자 샘이 그녀를 냉대하지만 일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미소를 띤다. 심지어 릭과 연인이었던 시절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곡을 연주해달라고 조른다. "Play it, Sam"이라는 명대사를 남긴 장면에서 일자는 주술을 걸 듯 노랫가락을 읊조린다. 이 영화를 봤을 때 나는 10대였는데 일자를 연기한 잉그리드 버그만이 뱃사람들을 유혹한다는 사이렌처럼 보였다. 마릴린 먼로나 리타 헤이워드, 브리짓드 바르도가 아니라. 적어도 그때의 나에겐 잉그리드 버그먼이 사이렌, 즉 요부의 이미지에 더 가까웠다.


그 유명한 As time goes by의 선율이 흐를 때 보이는 그녀의 표정 연기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이 장면이 유명한 까닭은 극 중에서 일자라는 캐릭터의 가면이 유일하게 벗겨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얄미울 정도로 태연자약하던 그녀의 표정이 음악이 흐르면서 회한과 상념에 젖은 얼굴로 바뀔 때면 나도 모르게 넋을 잃게 된다. 사실 일자라는 여자의 마음속에는 남편인 빅터도, 애인이었던 릭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옛 애인의 감정을 이용하는 걸 수도 있고, 애인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편에게 헌신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연기한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핑크스 같은 여자의 머리 속에 진실로 누가 있었을지는 연기를 한 잉그리드 버그만만 알 수 있을 것이다.



<Casablanca Best Scene-"Play it Sam. For old time's sake..."> https://youtu.be/1_a57ZNlU6o



영어식 이름인 잉그리드 버그만의 실제 스웨덴식 발음은 잉리드 베리만이다.

1915년 스톡홀름에서 스웨덴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3살 때 어머니를, 10년 뒤엔 아버지까지 여의고 13살의 나이로 고아가 됐다. 잔 다르크 이야기를 탐닉하고 연기에 관심을 보이던 소녀는 그 뒤로 친척의 집에서 자랐다. 그레타 가르보를 배출한 왕립 연극극장에서 연기를 배우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발군의 재능 덕에 22살의 나이가 됐을 때 이미 스웨덴에서 6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때마침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유명한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의 눈에 들어 스웨덴 영화 '인터메조'의 리메이크작 주연으로 캐스팅돼 할리우드로 진출한다.


스웨덴 영화 인터메조(1936년작)에서 그녀는 기혼남인 바이올리니스트와 사랑의 도피를 하는 피아니스트 아니타를 연기했는데 얄궂게도 그로부터 10여 년 뒤 잉그리드 버그만 자신도 유부남인 로셀리니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등지게 된다. 자신이 했던 연기와 똑같은 삶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면 인생이란 기묘하다. 요즈음 세상이야 TV만 켜면 불륜 소재의 각종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이 일도 아니지만 1930년대 당시에는 소위 '가정파괴범'인 아니타 역할이 획기적이고도 충격적인 캐릭터였다. 그리고 이것은 약 10년 뒤 잉그리드 버그만이 치러야 했던 대가들로도 증명된다.


로베르토 로셀리니가 그녀와의 첫 만남을 회상하며 증언한 바 있듯이, 잉그리드 버그만은 시대의 여배우였는데도 화장을 좀처럼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래 영상을 보면 왜 그랬나를 알 수 있다. 할리우드 데뷔작 '인터메조'의 카메라 테스트 영상인데 '노메이크업'이라는 글자가 뭇 여성들을 좌절시킨다. 얼굴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싱그러운 자연미. 보통 여자들이 3시간 화장한 것보다 더 예쁜 것 같다.


https://youtu.be/KIk_A115Src



'카사블랑카'로 이름을 날린 뒤 잉그리드 버그만은 승승장구를 거듭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945년부터는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의 '오명' '가스등' '남회귀선' 등에 잇달아 출연하면서 A급 여배우로 자리매김을 한다. 빼어난 외모에 뛰어난 연기력을 자랑하던 그녀를 두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한 말이 압권이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단점은 늘 그녀가 걸작을 만들기만을 바란다는 것이다."

그렇게 잘 나가던 그녀가 할리우드에 진출한 지 10년쯤 되던 1950년, 남편이 아닌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에 휩싸인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21살에 스웨덴에서 의사인 페터 린드스트롬과 결혼을 했고 딸까지 둔 유부녀였다. 만남이 시작된 것은 할리우드 생활에 싫증이 난 잉그리드 버그만이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기수,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에게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는 편지까지 직접 쓰면서부터 였다. 훗날 이 만남이 자신의 인생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오리란 걸 예상하지 못한 채. 하지만 운명을 직관했던 걸까? 그에게 보내는 편지 글이 문득 눈길을 끈다.


"감독님 영화 두 편을 봤는데 모두 마음에 들었어요.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만 독일어는 까먹었고 프랑스어는 할 줄 모르고 이탈리아어는 '사랑한다' 정도만 말할 줄 아는 스웨덴인 배우가 필요하시다면, 기꺼이 출연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당시 로베르토 로셀리니도 여배우 출신 아내인 안나 마그냐니 Anna Magnani와의 사이에서 아이 둘을 둔 유부남이었다. 둘 모두 배우자와 자녀가 있는 데다, 언어장벽까지 있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는 영어가 서툴렀고 잉그리드 버그만은 이탈리아어를 잘 하지 못 했다. 촬영이 끝날 무렵 여배우가 임신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사태가 겉잡을 수없이 커졌다. 영화 흥행은 참패로 끝났다. 누구도 가정 파괴자들의 영화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즈음처럼 인터넷으로 댓글을 바로바로 다는 세상에, 참으로 고전적인 수법이긴 하지만 여하튼 잉그리드 버그만은 그때 악의에 찬 항의 편지 수천 통을 받았다고 한다. 대부분 편지가 미국 발신이었는데 개중에는 태중의 아이에게까지 저주를 퍼붓는 글도 섞여 있었다. 그녀가 주로 들어야 했던 호칭도 W와 B로 시작되는 단어들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친구들 중 여전히 그녀를 지지해준 것은 케리 그란트, 어니스트 헤밍웨이뿐(아이의 대부가 되어 주겠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아이가 태어난 뒤 이들은 1950년 각자의 배우자와 이혼한 뒤 멕시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 중 이사벨라 로셀리니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여배우가 됐고 이사벨라의 아들 로베르토 로셀리니 Jr는 현재 모델로 활동 중이다.



giphy.gif 영화 '카사블랑카' 中, http://gph.is/XM5FuF



미국 사회로부터 도덕적 지탄을 받은 그녀는 보이콧을 당했고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지 못했다. 미국 상원은 당시 버그먼의 입국을 거부하는 조치를 취해 그녀는 1949년부터 1957년까지 미국 땅을 밟지 못했다. 부부는 '유로파 51', '이탈리아 여행' 같은 영화를 함께 만들어 재기를 시도했지만 흥행 실패로 돌아갔고 로셀리니 감독이 그녀가 다른 감독과 일하기를 꺼려하면서 결과적으로 재정상황이 악화돼 갔다. 1956년에 이르러서야 친구인 장 르누아르 감독과의 작업을 허용해 그녀가 '엘레나와 남자들'을 찍게 됐는데 그 무렵 로셀리니 감독이 정부인 안나 마그냐니와 인도에서 시간을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위태롭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로셀리니와 이혼한 잉그리드 버그만은 1957년에 다시 할리우드에 돌아와 '아나스타시아'로 두 번째 여우주연상을 거머쥔다.


그 뒤로도 인생의 반려자를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됐다. 스웨덴 연출가인 라스 슈미트와 결혼하지만 20년 뒤 다시 이혼한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으로 1974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 캐서린 햅번 다음으로 최다 수상을 기록하게 된다. 에미상, 토니상, 골든 글로브상, 3번의 오스카상을 거머쥔 여배우. 미국영화연구소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여배우 4위에 이름을 올린 그녀는 유방암 선고를 받았지만 연기를 멈추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싶지도 않다."


이후 이스라엘 전 총리 골다 메이어의 삶을 소재로 한 드라마 '골다라는 이름의 여자에 출연'해 연기를 펼치다 숨을 거둬 이 작품이 유작이 됐다. 향년 67세.










잉그리드 버그만은 할리우드가 바라는 금발 미인의 전형적인 외모를 다 갖추고 있었지만 대중들이 그에게서 기대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거부했다. 아름다운 외모 아래 숨은 솔직함과 대담성, 이곳에서 만났던 스웨덴 여성들에게서 내가 느꼈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다부진 인상과 중성적인 아름다움. 외모라는 거죽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강인함과 우아함, 당당함이 여느 할리우드 여배우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그만의 특징이었다.


그녀는 내가 어릴 때부터 흠모한 배우 중 한 사람이었는데 사실 애초에 '북유럽 女자'를 기획하게 된 계기도 잉그리드 버그만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서였다. 그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고. 그런데 막상 자료를 읽다 보니 윤리적으로 옳다, 그르다 가치판단을 떠나서 남의 인생이 아닌 자신의 삶을 살고자 절박하게 노력했던, 자유롭고자 했던 한 개인의 삶이 보였다.


'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가 남긴 유명한 대사, "We’ll Always Have Paris."(비록 헤어져도 함께 했던 파리를 잊지 말자는 의미)를 빌어 어린 시절 나의 우상이었던 그녀의 삶을 다시 한번 기리고 싶다. We’ll Always Have YOU, Ingrid Bergman.





Her Quote
Until 45 I can play a woman in love. After 55 I can play grandmothers. But between those ten years, it is difficult for an actress.
45세까지는 사랑에 빠진 여자를 연기할 수 있지만 55세가 지나면 할머니 배역을 맡아야 해요. 중간에 낀 10년의 기간은 여배우에게 혹독한 시기겠네요.
I don’t want any roots, I want to be free.
어딘가에 뿌리내리고 싶진 않아, 자유롭고 싶지

No, I have no regrets at all, I regret the things I didn’t do,
not what I did.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일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전혀요, 하지 않은 일을 후회하지 한 일에 대해선 후회가 없어요.



Destination for tourists

스톡홀름의 묘지. Northern Cemetery(Norra Begravningsplatsen) Stockholm, Sweden. 묘비에는 '생애 마지막까지 연기를 했다'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스트롬볼리의 Stromboli 빨간 집. 불륜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을 당시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영화 '스트롬볼리'를 찍으면서 함께 거주했던 집.

Bohusläns museum, Stockholm, Sweden. 잉그리드 버그만 비상설 전시를 여는 박물관.

웨슬리안 대학교 영화 기록보관소. Wesleyan Cinema Archive. 잉그리드 버그만과 그의 출연 작품 관련 영화 자료를 저장하고 있는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