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야 할로넨 / '여성 대통령'의 바람직한 사례
"왜 스웨덴 여성들 중에선 행정부 수장이 안 나오나"
유럽위원회 장관에 임명됐던 스웨덴인 비르짓타 올손 Birgitta Ohlsson이 언론에 쏟아낸 볼멘소리를 듣고 있자면 부러움 섞인 시샘마저 느껴진다. 의회 의석의 45%를 여성이 점유(2013년 기준) 하고 있는 스웨덴이다. 정치권력 분할에 있어서 양성평등을 실현했다고 자인할 수 있는 국가인데도 행정부 선출직까지 여권이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옆 나라인 노르웨이는 일찍이 여성 총리인 그로 할렘 브룬틀란 Gro Harlem Brundtland (3선/ 1981, 1986–89, 1990–96)을, 덴마크도 헬레 토르닝 슈미트 Helle Thorning-Schmidt (2011-2015)를 배출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저 그로 할렘 브룬틀란은 오슬로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의사 출신으로 하버드대에서 공중보건학을 공부한 뒤 돌연 정계에 입문, 세 차례 총리직을 수행한 넘사벽의 스펙을 자랑하는 능력자다) 이에 질세라 아이슬란드도 당시 여성 언론인과 동거하면서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한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 Johanna Sigurdardottir (2009-2013)를 총리로 임명했으니, 따지고 보면 스웨덴은 노르딕 국가들 중에선 유일하게 아직도 여성 행정부 수반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나라인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왜 우리는??!"이라는 피맺힌(?) 외침이 조금이나마 이해는 간다. 앞서 언급한 스칸디나비아 국가군에서 빠져 있는 핀란드도 이미 2차례나 여성 행정부 수반을 선출(2003년, 국무총리직에 Anneli Jäätteenmäki)한 전례가 있다. 대략 눈치를 채셨겠지만 이번에 소개할 여성 정치인 역시 노르웨이의 그로 할렘 브룬틀란에 필적하는 3선 연임 (2000-2012) 기록의 소유자, 핀란드의 타르야 할로넨이다.
타르야 할로넨 전 대통령(by Janwikifoto)과 미국 유명 코미디언 코넌 오브라이언( 右, by Gage Skidmore, 양측 사진 모두 출처는 Wikimedia Commons)의 사진인데 특징적인 붉은 머리 탓인지 얼핏 비슷해 보인다.
타르야 할로넨은 우리나라에선 어쩐지 '핀란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보다 미국 코미디 프로그램 진행자 '코난과 닮은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코난 오브라이언이 가장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 쇼 호스트에게 주는 상을 받기 위해 핀란드를 방문했던 2006년에 두 사람은 실제로 처음 만나게 된다. 헬싱키 대통령궁에서 진행된 15분 간의 접견 자리에서 코난 오브라이언이 타르야 할로넨 전 대통령에게 준비해 간 밸런타인데이 선물을 건네는 장면이 현지 언론 지면을 장식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녀의 총 재임 기간은 10년이 넘는 12년이다. 당시 타르야 할로넨은 재선 임기가 거의 끝나가던 무렵이었는데 3선 도전을 눈 앞에 두고 있던 차였다. 코난 오브라이언이 대통령궁을 방문하기 직전까지도 대통령을 꼭 빼닮은 얼굴로 거리 유세(?)를 하며 선거운동을 대신 해준 덕이었는지 타르야 할로넨은 결국 3선에 성공한다.
1948년, 5살의 타르야 할로넨과 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 18세의 그녀. Wikimedia Commons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의 전통적인 노동계급 서민 거주지역인 Kallio에서 태어난 타르야 할로넨의 어릴 적 꿈은 화가 같은 예술가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작은 교육이라는 것을 깨닫고 헬싱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 1971년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한 뒤 의회담당 변호사로 일했다. 1979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외무장관직을 거쳐 사회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2000년에 핀란드 최초의 여자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첫 임기가 끝났을 무렵 2003년 그녀의 지지율이 88%에 달했다고 하니 그때의 대중적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재임기간 그녀는 출신 정당(사회민주당)이 말해주듯 좌파적 색채가 강한 정책을 고수했는데 EEC(유럽연합 EU의 전신)와의 자유무역 협정에 반대하는 진영에 섰고, 나토 가입에도 부정적 견해를 비췄다. 구소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되 중립을 유지하는 케코넨 Kekkonen 전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견지했다.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복지, 인권과 양성평등, 사회정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도 타르야 할로넨이 추진하는 정책 기조의 초점이 맞춰졌는데, 특히 미래 세대를 위한 자원을 낭비하지 않으면서도 현세대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발전에 관심을 가졌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고 고임금 일자리를 창출할 뿐만 아니라 노동의 생산성도 제고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이를 위해서는 시민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말을 강조했는데 지도자가 국민들에게 권력의 상당 부분을 이양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2006년에 재선에 성공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그해는 핀란드가 세계에서 최초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1906년)한 지 100주년이 된 해이기도 했다.
피사 수치가 하락하기 시작하는 등 최근 들어 저조한 빛을 보이지만 핀란드의 교육은 오래전부터 성공적인 모델로 각광받아 왔는데 정부가 교육을 최우선 정책 순위로 걸었기 때문에 원자재 수출 국가였던 핀란드가 노키아 같은 하이테크 수출국가로 한걸음 도약하게 됐다고 분석하는 견해가 많다. 타르야 할로넨은 그 중심에서 교육에 대한 투자를 강조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반면 경제관과 재정 정책 분야에서는 정적이기도 한 비요른 와일루스 Björn Wahlroos (Sampo bank와 Nordea bank, UPM의 회장)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최근에는 대통령 권한 강화 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두 사람이 대립하고 있는 모양새다. 어쨌거나 그녀는 아직도 핀란드가 독립한 1917년 이래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으로 손꼽히고 있고 재임기간 선호도 평가에서는(2004년 기준) 94%에 달하는 전례 없는 지지를 받을 정도로 만인의 사랑을 독차지해 왔다.
"First Gentleman"
적잖은 스칸디나비아 여성들이 그렇듯 타르야 할로넨 역시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첫번째 동거남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출산했다. 그 자신도 미혼모인 어머니 밑에서, 더 정확하게는 이혼가정의 자녀로 자랐지만 편부모/이혼 가정이 40%에 육박할만큼 흔하고 그렇기 때문에 허물이 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그리 드문 케이스는 아닌 것 같다. (별개의 이야기지만 2014년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미혼 여성의 국정 수행에 관련한 질문을 던졌는데 그때 타르야 할로넨이 "가족이 없더라도 다양한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도움이 된다. 가족보다 중요한 것은 프렌드십이다"라는 대답을 했는데 '여성이 무엇을 혼자 하려 들지 말고 조직화하고, 네트워크를 활용하라'는 취지에서 나온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한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 잘못된 교우관계로 불명예스럽게 실각한 지금에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답변이었다)
딸을 낳은 뒤 동거남과 헤어지고 미혼모로 딸을 기르던 타르야 할로넨은 1985년에 만난 펜띠 아라야비 Pentti Arajävi와의 동거 생활을 10년 넘게 이어왔다. 그러다 새삼스럽게(?)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서야 2000년 8월, 15년 간 동거하던 파트너 펜띠와 결혼하게 된다. 법학 박사로 요엔수 대학, 동핀란드 대학에서 교단에 서기도 했던 그는 소아정신과 의사이자 교수이기도 한 아버지와 대학 강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전형적인 교육자 집안에서 자라났다.
배우자의 임기 기간 동안 연구자로 계속 활동하거나 국회에서 공직생활을 하기도 했다. Lion of Finland, White Rose of Finland 같은 명예로운 칭호를 부여받고 어린이들을 위한 복지연맹, 핀란드 정신건강 사회재단, 핀란드 농구협회 등 여러 기관의 단체장으로도 활동하면서 아내 못지않게 사회 다방면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 개인적 자유가 제한당하고 사회적으로 압박을 느껴온 '퍼스트 젠틀맨'으로서의 생활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언론에 털어놓기도 했다.
... 혹시나 몇 해 전 국내 매체에도 소개된 '덴마크 공주 가슴 사건'으로 그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다면, 생각하시는 그분이 맞다. 2012년 덴마크 마르그레트 여왕의 만찬에 초청된 아라야비 박사가 여왕의 며느리인 메리 공주의 옆좌석에 앉게 됐는데 박사의 눈길이 공주의 슴가에 꽂힌 순간이 영상으로 고스란히 찍히면서 문제가 됐다. 공주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다 박사의 시선을 눈치채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박사가 애꿎은 만찬장 천장을 응시하는 장면이 찍힌 것. 당시 덴마크 현지 언론들이 결례라고 꼬집고 있을 때 정작 사건(?)을 첫 보도한 더 선紙(The Sun)는 "클리비지가 아니라 공주가 걸고 있던 목걸이에 감탄했던 걸 수도 있다"라는 염장인지 변호인지 모를 듯한 말로 박사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건넸다고.
Her quote
The Finland of the 21st century can thrive only if women of learning - in common with their male counterparts - are guaranteed the opportunity to use their creative potential to the full.
21세기 핀란드의 미래는 교육받은 여성들이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재능을 온전히 발휘할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Destination for tourists
Presidential Palace. 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대통령궁. 타르야 할로넨이 12년간 국정을 돌본 집무실을 포함해 가족들과 각료들을 위한 숙박시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