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 베케르 /트렌스젠더 배우 겸 감독, 사회운동가
"마치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감내하기 벅찬 시간이었어요."
1988년 이웃 간 왕래조차 드문 스웨덴의 작은 마을 Eringsboda에서 나고, 자란 사가 베케르는 평범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일찍 자신의 남다른 성정체성을 감지했다. 원치 않는 성별을 타고난 이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녀도 학창시절 괴롭힘에 시달리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고 폭음과 거식증, 거듭되는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그러던 19세가 되던 해에 드디어 결심한다. 주어진 성을 바꾸기로.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놓인 문제였으나 결국 살아남는 쪽을 택했다. 훗날 그녀는 한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때 자신의 건 일생일대의 도박이 성공했노라고, 그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털어놨다.
새롭게 태어난 사가는 Eli Leven의 소설 'You Are the Roots That Sleep at My Feet and Keep the Earth in Place'을 원작으로 한 영화, 'Something Must Break (2014년 작)'로 데뷔한다. 정식적인 연기 지도를 받은 적도 없고 이전에 연기를 해본 적도 없는 그녀였지만 첫 무대에 서자마자 같은해 스톡홀름에서 열린 필름 페스티벌에서 Rising Star Award 후보로 노미네이트되는 성과를 거둔다. 비록 수상은 좌절됐지만 이 영화를 계기로 떠오르는 신예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 각인되는 데 성공했다. 아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듬해, 24세의 사가는 스웨덴의 오스카상이라 할 수 있는 굴드바게상 Guldbagge Award (여주주연상)을 트렌스젠더 배우 최초로 수상한다. 그녀는 "보수적인 스웨덴 영화계 분위기를 감안할 때 수상 가능성을 조금도 점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그리고 올해 초에는 비욘세의 앨범 Lemonade에서 영감을 얻은 단편 영화 'Fuckgirls'로 감독 데뷔를 알렸다.
'Something Must Break(Nånting måste gå sönder, 2014)' (출처: https://youtu.be/e1ytaTThruo)
성전환 수술을 받기 전까지 십대 때 이어진 숱한 자살시도는, 그녀가 2015년에 자살예방 사회단체 Suicide Zero의 홍보대사로 위촉받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학창시절 그여서 벌어진 상처를 손목에 훤히 들어낸 채 배회하던 소녀가 이제는 HBTQ(Homosexual, Bisexual, Transgender and Queer)라고 요약되는 사회 취약계층의 재활과 정신 상담을 지원하는 일을 도맡게 된 것이다. 사가는 줄곧 스웨덴의 영화계에도 트렌스젠더 배우들에게 좀 더 많은 배역을 할당해줄 것을 요구해 왔다. 트렌스젠더를 이야기할 때 곧잘 곡해되는 사실 중 하나가 성전환을 일종의 성적취향으로 해석하거나, 성정체성은 변화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인데 사가 자신도 후자에 속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제 성정체성은 성전환 수술을 받은 후에도, 전과 같이 달라진 바가 없었어요."
'트렌스젠더는 정신질환자?'
스웨덴은 1970년대에 세계에서 최초로 성별전환을 법적으로 허용한 국가이지만, 성전환자가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다고 판단, 불임수술을 강요한 어두운 역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1972년부터 스웨덴에서 성전환 수술을 받으려면 의무적으로 불임수술을 받아야 하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약 8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강제 불임시술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에 대해 2012년, 해당 법안이 인권침해라고 판단한 스웨덴 법원이 위헌판결을 내리게 된다. 올해 3월부터는 스웨덴 보건복지부가 성전환 수술 도중 불임시술을 법적으로 강요당한 모든 트렌스젠더들에게 인당 22만 5천 크로네(한화 약 2천900만 원)를 보상하는 법안을 추진하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원칙적으로 WTO는 LGBT 중에서 유일하게 트렌스젠더를 정신병 질환자(mentally ill)로 분류하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오는 2018년부터는 이런 분류 규정이 개정돼 정신질환자 목록에서 트렌스젠더도 제외되게 됐다. 올해 초 스웨덴 보건당국도 변화한 WTO의 성전환자 분류 지침에 따라 기존 규정을 삭제하기로 한 방침을 밝히면서 되레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스웨덴에서는 우울증 환자군 중에서 트렌스젠더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비교적 높게 나타나는데, 보건복지부가 Karolinska Institute와 공동으로 실시한 최근 조사에서 특히 15세부터 19세까지 젊은층의 자살 시도율이 약 40%로 두드러졌다. (자살을 생각해본 적 있다고 답한 비율은 60%) 사실 이런 공식 보고서가 나오기 이전부터 트렌스젠더들의 우울증, 자살율이 높게 보고됐기 때문에 이는 오랫동안 성전환자들을 정신 질환자로 분류하는 근거로 악용되기도 했다. 성전환자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과 고립 때문에 우울증이 오는 것인지, 우울해서 성전환자가 되는 것인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란은 오랫동안 존재해 왔지만 성전환자를 정신 질환자 목록에서 배제하는 것이 전 세계적인 추세인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이런 움직임을 수용한 탓인지, 스웨덴 정부가 이번 달(2017년 10월)부터 성전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생활여건과 정신건강 실태 조사에 착수할 것을 공중보건국에 지시했다는 고무적인 소식도 들린다.
여성으로는 드물게 차량 광고 Volvo의 뮤즈로 등장한 사가 베케르. 그녀의 삶과 연기에 대한 나레이션과 후반부에 등장하는 'It's your journey' 라는 카피가 돋보인다. (출처: https://youtu.be/KDOn-IDrcAk?t=14s)
아마도 사가 베케르에게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2015년은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의미있는 한해였을 것이다. 2015년부터 스웨덴학술원이 남성(Han, 영어의 He) 또는 여성(Hon, 영어의 She)을 지칭하는 게 아닌 성중립 대명사 'Hen'을 새로운 단어로 언어 사전에 등재하면서 공식 문서와 언론 보도에도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Hen'은 1960년대부터 스웨덴 사회에서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됐지만 더 이상 성별 표기를 원치 않는 이들이 생겨남에 따라 2000년대부터 사용이 본격화됐다. 같은 해 순드비베리 지자체가 스톡홀름 북부 교외의 한 공용 수영장에 남성용, 여성용과는 별개로 제3의 성을 수용하기 위한 중립적 탈의실을 최초로 신설, 운영해 세계적으로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Her Quote
I have always been a dreamer ever since I was a child. I don't know I feel alive when I do acting. What I'm doing is actually changing things, Changing how people look at the industry, movies and.. yes, I'll change things.
어렸을 때부터 전 늘 꿈꾸는 사람이었어요. 연기에 몰두할 때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죠. 제가 하는 일은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