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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과나 Jul 08. 2024

빨리 아줌마가 되고 싶었다

신방과 대학원 때 일이다. 대학원 후배 중에 누군가가 '아줌마'라는 말에 담긴 사회적 함의에 대한 다큐를 만들고 싶다며 대학원 사람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다들 '아줌마'라고 누군가를 부르고 불릴 때 그 말의 사전적인 의미에 더해지는 비하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아줌마의 마인드를 가진 내가 되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때는 대학교 2학년인가 3학년 초였다. 당시 나는 방학이 되면 본가인 부산으로 돌아가 방학 내내 딱 두 가지를 했다. 1. 영어회화 학원. 2. 검도. 그 중에서도 열심히 했던 건 검도였다. 마침 내가 살던 집 근처에 있는 도장이 고등학교 검도 특기생들이 운동을 하는 도장이었다. 처음에는 운동을 오전이나 오후에 한 번 했다. 저녁시간 운동에는 고등학생들이 운동을 받아주러 나왔다. 그렇게 안면을 트고 도장의 관장님과 사범님이 다 이 고등학교 출신이시다보니 알음알음 알게 되고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학생이 매일 검도를 하니까 좋게 봐주셨던 것 같다. 

급기야 다음 방학에는 고등학생들 운동하는 시간에 같이 운동을 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고등학생들이랑 오전운동 오후 운동을 같이 했다. 대학을 가려고 검도를 하는 학생들이 보기에 저 누나는 공부로 대학을 가놓고 왜 때문에 저렇게 열심히 검도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 들었던 말이 "누나는 검도에 미쳤지요.(부산 억양으로 읽어주세요.)"였다.

그렇게 고등학교 선수들이랑 열심히 운동을 하고 당시 초창기였던 SBS 검도왕 대회에 나름 청운의 꿈을 품고 출전했다. 이 대회는 8강인가, 4강부터 경기를 중계해주는 대회여서 까딱 잘못하면 테레비에 나오는 거 아니냐며 설레발을 쳤다. 그만큼 열심히 준비했었다.

첫 상대는 아줌마였다. 딱 봐도 자세도 좋지 않고 머리를 기깔나게 잘 치는 것도 아니고 쉽게 이기고 나올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시합장에 들어가보니 이건 뭐지? 키도 작고 중단 자세도 이상한데 이 당당함은 어디서 나오지? 분명히 내가 더 리치도 길고 빠른데 왜 기가 안 죽지? 뭔가 이판사판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이 배짱. 도대체 뭐지?

당황해서 헤매다가 아무튼 별 거 아닌 걸 맞고 지고 나왔다.

준비 많이 하고 출전한 대회에서 첫 경기에 꽂아칼 하고 호구를 챙기는데 얼떨떨했다.

'뭐였지? 그건?'

20대 초반 내가 내린 결론은 "아줌마여서 그렇구나! 내 배 아파서 낳은 아이 두어 명 세상에 내놓고 나니 무서울 게 없어져서 그런 거구나." 였다.(사실 그분이 실제로 그런지 어떤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나 혼자 한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배짱 두둑한 아줌마가 되고 싶다고 인터뷰를 했었다. 나중에 그 후배에게 너무 새롭고, 좋은 얘기라 꼭 싣고 싶었는데 다큐의 논리 전개상 맞지 않아서 넣지 못했다고 미안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야말로 다큐의 의도에 맞는 얘기를 해줬어야 되는데 나 하고 싶은 얘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지나갔다.

그 뒤로는 시합장에 들어갈 때마다 검도의 4계를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주문을 걸었다. 아직 아줌마가 안 되어서 그 마인드는 안 나올테니 일단 이걸로라도 정신을 가다듬자, 뭐 그런 임시방편이었던 셈이다. 그러고는 주로 대학연맹전 같은 경기에 나가 비슷한 젊은이들과 경기를 하다보니 어느샌가 그 생각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었나보다.

다시 검도를 시작하고 나니 잊고 있었던 생각들이 마치 방문을 닫아 걸어 억지로 막아두었던 문이 열려버린 것처럼 이것저것 쏟아져나왔다. 그 중 어이 없게도 내 아줌마성에 대한 자각도 있었다. 

'가만 있어봐? 내가 지금 그렇게 되고 싶었던 아줌마가 되었네? 십 년 넘게 검도 안 하고 뭐했나 했더니 애 둘 낳고 이제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아줌마가 되어 있었네.' 이제 나도 나보다 체격 조건 좋고 운동 많이 한 사람들 만나도 쫄지말고 배짱있게 해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 몸뚱이가 문제임.

내 몸을 밀어서 움직여야 하는 왼쪽 발목이 과격한 움직임에 놀라, 파업에 나서셨고...아르헨티나에서 사회인 검도대회 출전하러 왔던 젊은이랑 잠깐 연습하다가 부딪혀서 손목이 삐그덕 거린다.





아줌마가 되고 싶었지만 아줌마가 되고보니 몸뚱아리가 말을 안 듣는 슬픈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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