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익 시험을 치고 왔다.
우리집에서 제일 가까운 고등학교인데 구가 달라서 슈는 여길 두고 버스 30분 타고 가야하는 학교를 가야하네...
유튭 쇼츠에서 슬쩍 본 영상 중에 방에서 방으로 건너다닐 때 폰을 들고 다니고, 사람들하고 이야기할 때 테이블 위에 폰 올려놓고, 아침에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잘 잤냐'고 인사를 하기 전에 핸드폰부터 드는 건 심각한 거라는 내용이 있었다.
그걸 보고 우리 가족들을 돌아보니 애들도 애들이지만 나도 문제였다. 설겆이나 청소기 밀 때, 칼로 뭘 잔뜩 썰어야 할 때 등등 집안일 할 때 넷플릭스 시리즈를 틀어놓고 들고다니면서 보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서인지 요즘 책 읽는 게 영 진도가 안 나간다. 요새는 그래서 집안일 할 때 밀리의 서재 읽기 모드로 설정해놓고 듣기 시작했다.
달보드레 문학독서 모임에서 읽다가 다 못 읽은 작품이 늘어간다.
모옌의 개구리, 이탈로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낙원...
예전에는 토요일에 몰아서 읽으면 다 읽을 수 있었는데 이제 하루에 몰아읽기가 잘 안 된다. 이게 다 스마트폰 중독이라 그렇지 싶다.
예전에는 영어나 일어로 말을 해야할 때 미리 입으로 뱉어보고 발화를 완성시켜서 연습을 해봐야 했다면 이제는 한국말도 남들 앞에서 얘기하려면 입으로 단어들을 소환해서 말을 만들어봐야 되는 느낌. 안 그러면 단어들 로딩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 것이다. 유튭 쇼츠에 쩔어있는 요즘 나의 증상들이다. 앤다 노화?
그래서 시험을 보는 약 120분 간은 그래서 나에게 짧은 템플스테이 같은 느낌이랄까.
이번에도 이 120분 간의 템플스테이에 디지털 디톡스를 하면서 잘 집중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지며 시험을 쳤다. 다행히 핸드폰 없이 120분 간 집중하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약 6만원의 돈을 내고 집에서 10분 걸어가서 120분간 묵언 수행을 하는 짧은 템플스테이 겸 디지털 디톡스 올해도 완료.(2주 뒤에 또 한번 있음 주의. 공부는 1도 안 함 주의.)
듣기 평가 때 냉난방 소리가 거슬린다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냉난방을 끄고 듣기 평가를 한다는 게 원칙이라고 한다. 듣기 평가 오디오가 잘 들리는지 계속 틀어주는데 오디오에서 방송이 나오고 있을 때는 난방소리가 완전 묻혀버릴 정도로 오디오가 압도적인데 무슨 난방을 꺼, 난방을 끄기는. 아니 무슨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라도 나냐고.
오늘 내가 시험친 고사실 24명 중 두 명이 난방 꺼달라고 해서 듣기평가 동안 난방을 끄고 시험을 쳤다. 그럼 어떻게 되겠어? 좀 조용해 지겠지. 그런데 고사실 온도가 어떻게 돼? 싸늘해지지. 다들 외투 벗고 시험치는데 난방 끄면 금방 실내온도가 뚝 떨어져. 다리가 막 시려.
아니, 귀에 들리는 것만 듣기평가에 영향이 있어? '아, 씨, 추워죽겠네' 싶은 나머지 22명이 집중력 흐트러지는 건 어떻게 보상할 거임? 그게 맞아요? 이게 공정이야? 나머지 22명의 따뜻하게 시험 치고 싶은 사람들의 의사는 그렇게 무시해도 돼? 왜 평소에 얘기할 때도 냉난방 다 끄고 하시지?
냉난방 소리도 끄고 싶은 사람의 뜻이 그렇게 소중하면 시험 신청할 때 따로 신청 받으시라고요. 듣기평가 때 냉난방 소음이 없는 게 냉골에서 시험치는 것보다, 교실 안이 사우나로 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만 고요하게 시험 보시라고요.
듣기평가 치다가 추워서 옷 주워입느라 짜증난 1인.
이게 맞나? 생각하다가 듣기평가에 큰 지장 생긴 1인.
시험 끝나고 나가면서 앞에 가던 여학생이 친구한테 전화해서 '난방 꺼서 개추웠어'라고 하소연하는 거 듣고 큰 공감한 1인.
토익시험이라는 이름의 템플스테이 겸 디지털 디톡스.
집중력 테스트는 성공인데 마음의 평화는 얻지 못하였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