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하는 뇌로 개조하다 생긴 일

혼내다가 혼나보니 알게 된 것

by 칼과나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 지하철에서 걸어서 우리집으로 오는 사람에게는 길을 설명하기가 쉬웠다. 나는 걸어다니는 사람의 뇌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임 끝에 집에 데려다주는 사람에게 차가 다니는 길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도보로는 길만 건너면 되는 길을 운전해서 갈 때는 좌회전이 안 되는 곳이어서 멀리 가서 U턴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나에게는 운전하는 버전의 뇌가 없기 때문이다.


차가 소중해서 좀처럼 나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않는 남편이 가끔 내게 운전을 부탁할 때는 충청도 이남의 텅 빈 고속도로를 달리다 졸음이 쏟아질 때였다. 주행테스트 중인 자율주행 AI도 운전할 수 있을만한 길에서만 몇 달에 한 번씩 운전을 했다.


그러니 주행 거리가 쌓여가도 차량 통행이 많은 시내 운전 경험은 별로 없었고 조수석에 앉아서보던 길과 내가 운전대를 잡고 달려야 하는 길은 전혀 달랐다. 남편이 나에게 운전연습을 시키는 이유는 시댁이나 친정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여행을 하려면 차가 두 대 움직여야 하고 그러려면 나도 운전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선 집에서 시댁까지 가는 길에 나에게 운전을 시키는 일이 많아졌다.


남편은 ‘한 번 제대로 봐둬. 그러면 다음에는 물어보지 않고도 갈 수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나도 한 번 운전해서 가보면 남편 말처럼 다 외워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실상은 한두서너대여섯 번 가봤다고 모든 코스가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아서 남편에게 매번 물어본다.


“지금 하나 오른쪽으로 들어가?”

“여기서 쭉 가?”


마치 선수생활을 할 때 승승장구했던 천재 플레이어가, 자기처럼 천재가 아닌 선수들을 훈련시켜 이끌어가는 감독으로서는 좋지 않은 것처럼 남편은 그렇게 여러 번 와본 길을 어떻게 아직도 물어보는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당신도 내가 된장국 끓이는 거 여러 번 봤으니까 끓일 줄 알겠네? 오늘부터 님이 된장국 끓여주실래요?” 하자 그제야 조금은 이해가 되었는지 “지금 하나 왼쪽으로 가. 이대로 쭉 가. 뒤에 차 오는지 확인하고 여기서 하나 오른쪽으로 가.” 하면서 청기백기 놀이하듯 알려주었다.


우리집에서 시댁에 가려면 간선도로를 여러 번 바꿔타야 한다. 매 합류지점마다 어느 차선에 있어야 하는지를 이 정도 반복했으면 외웠겠지,라고 남편은 생각하지만 운전하는 버전의 내 두뇌는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한 번 갈 때마다 조금씩 아는 구간이 늘어나기는 하지만 매일 가는 것도 아니라서 동시에 잊어버리기도 한다.


‘아, 이것도 기억 못하다니 나는 머리가 나쁜가봐',라고 자학하지는 않았다. 사람의 재능은 저마다 다르게 생겼고 나는 다른 걸 잘 하니까(진짜?) 이걸 좀 못하는 것으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남편은 그렇게 여러 번 다녀본 길을 아직도 외우지 못하고 또 물어보면서 전혀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이쯤되면 좀 외워라 좀.’ 어금니를 악물며 말하는 남편의 불친절한 기대치를 들으면 중1이나 되어서 아직도 영어의 현재 진행형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물가물한 아들에게 언성을 높이는 내가 떠오른다. 내가 아이에게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하루 한 페이지씩 읽게 한 문장 패턴들을 5학년 때도 6학년 때도 다시 설명하면서 그걸 몇 번을 설명했는데 아직도 모르나 싶어 한심해하는 그 마음이 딱 지금 남편 마음이겠지 생각하면 남편이 이해가 된다. 물론 못 되게 말해서 미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머리로는 이해한다는 뜻이다.


‘그때 아이도 지금 나처럼 억울했겠다. 기억이 안 나는데 어쩌라고. 그냥 친절하게 다시 한번 알려주면 안 되나?’라는 생각이 들었겠다. 절로 역지사지가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아이가 이걸 딱 챙겨서 외워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던 그 마음으로 운전에 대한 책을 공부해갈까 싶기도 했다. 서운한 마음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어렵게 어렵게 다른 방향으로도 역지사지를 적용해 본 것이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니 가르치는 즐거움이 이런 것인가 싶다는 말을 듣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를 기억하려고 노력은 하는 학생이 되어보고자 한다.


저번 주에 다녀온 길을 이번 주에도 또 물어봐도 친절하게 처음인 것처럼 알려주면 좋겠다. 나도 아이에게 그렇게 해야겠다고 운전을 배우다 결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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