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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과나 Aug 12. 2023

같은 소리 십 년째, 지겹다 지겨워


© michael75, 출처 Unsplash


모범생이었던 나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아들에게는 많다.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할지 여전히 모르겠다.


중학생이지만 공부를 안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아들이 요즘 조금 나아지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할 일을 다 할 때까지 휴대폰을 안방에 갖다 놓으라고 하면 일단 낮에 황금 같은 시간은 침대에 누워서 잔다.


낮에 활동해야 하는 시간에는 침대에 들어가지 말란 말이야!


운동을 하고 집에 오면 9시 가까이 되는데 샤워하고 뭘 좀 먹는다면서 한 시간쯤 핸드폰을 잡고 있는다. 아들의 스케줄에 계속 신경을 쓰면서 이제 그만 공부를 시작해라, 재촉을 할 정신도 없지만 할 일 먼저 하라고 말해봤자 자기가 마음 속에 그어놓은, 공부를 시작해야 할 시각의 마지노선이 닥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할 일을 먼저 했을 때의 해방감, 자기 효능감 그런 걸 한 번이라도 느껴보라고!


그러다 마침내 문제를 풀어서 채점을 해달라며 들고오는데 나는 그때쯤이면 하루중 유일하게 내 시간을 맞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밖에 나가서 걷거나 하는 중이다. 아들은 내게 공을 넘겨놓고 엄마가 채점을 다 할 때까지 좀 쉰다며 핸드폰을 잡거나 노트북으로 게임을 한다. 열일 제껴놓고 아이 귀를 잡아 책상 앞에 앉히는 정성이 있으면 좋겠지만 아이 케어냐, 내 시간이냐의 갈림길에서 대체로 내 시간을 선택한다.


니 인생은 니 것, 내 인생은 내 것. 내 것 먼저 챙기실게요.


문제집을 푼다, 채점을 한다, 모르는 부분을 알도록 공부한다,까지가 니 하루 공부 분량이다,라고 초등학고 4학년 때부터 얘기했는데 아직도 아이의 생각은 문제집을 푼다,에서 머물러 있다.


게다가 풀어온 부분은 항상 그 단원에서 제일 쉬운 부분이다. 생각이 많이 필요하거나 어려운 부분, 실력향상 문제 같은 걸 풀 차례가 되면 뛰어넘고 다음 단원의 제일 쉬운 부분을 풀어오는 식이다.


그러니 아이는 제딴에는 하기 싫은 마음을 이기고 문제를 풀어갔는데 엄마는 페이지를 앞뒤로 살핀 후 '너 또 뛰어넘어서 쉬운 것만 풀어왔네',같은 소리를 듣는 것이지. 


항상 그날 한 분량에 날짜를 쓰라고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전에 풀었던 걸 오늘 푼 것처럼 둘러댈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렇게~ 그걸 안한다. 지겹다.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한 게 어언 몇 년인가.


일단 풀어온 문제를 채점하고 공부를 시작한다. 틀린 문제가 많다. 가만 보니 문제를 푼 흔적은 없고 객관식 사지선다에 동그라미만 쳐놓았다. 주관식은 모르겠다며 비워놓았다. 틀린 걸 다시 풀라고 하면 다시 다른 선택지에 동그라미를 친다. 이게 맞을지도 모르잖아요,라며.


문제를 푸는 목적은 문제를 풀어서 무엇을 모르는지 알고  몰랐던 걸 알기 위해서인데 이럴 거면 왜 문제지를 풀어? 종이 낭비하려고? 엄마의 알량한 자유시간 없애려고?


드디어 문제를 푼다. 10문제 중에 6개를 틀렸는데 4개쯤 틀린 문제를 풀고나면 아이의 마음 속에 그어놓은 한계에 도달한다. 너무 공부를 많이 했다,라고 생각이 되면 네고를 시작한다. 하나만 더 풀고 남은 건 내일 풀게요.


내일하겠다는 약속은 쉽다. 문제는 그걸 해야하는 날은 언제나 오늘이라는 점이다. '한 번이라도 오늘 분량을 좀 산뜻하게 다 풀 수는 없니?' 잔소리를 하면 아이는 하기 싫은 마음에 듣기 싫은 소리까지 들어서 더 문제를 풀기 싫어진다. 아이의 패턴이 눈에 선하다. 그걸 조금씩 극복해가자고 어르고 달래며 하루하루를 부족한 채로 끌어왔다.


그러다 며칠 전 올 것이 왔다.


아이는 7시 반 운동을 하는데 7시 반에 집에서 나간다. 처음 20분은 몸풀기 시간이라 그렇다고 한다. 몸푸는 시간이 부상을 예방하고 체력을 기르는데 중요하니 꼭 시간 맞춰 가라고 했다.


그 얘기를 한 다음날인가 6시반인데 운동을 한다고 집을 나섰다.

웬일인가 했지만 기쁘게 배웅했다.


그런데 9시반이 되어도 아이가 오지 않는다. 한 시간 가량 늦게 돌아온 아이에게 이유를 물었다. 스파링이 늦게 끝났단다. 생각해보니 체육관에 도착하고 나갈 때 오던 문자가 오지 않았다. 다시 한번 이유를 물었다. 체크하는 걸 깜빡했단다.


도장에 전화를 했다. 관장님은 전화를 받지 않고 아이는 내 앞을 불안하게 오간다. 그때까지만 해도 의심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팩트체크를 해두려고 했다. 엄마는 만만하지 않다. 내가 하는 말을 크로스체크 한다는 걸 알려주려고.


설마, 너 운동 안 갔니? 했더니 안 갔단다.


그 지점에서 폭발했다. 


공부는 안 할 수 있고, 하기 싫을 수 있는데, 왜 엄마를 속여?


평생 입 밖으로 욕을 내지 않고 살았는데 아들에게 욕을 했다. 그 욕을 하면 내가 개가 되고 돼지가 되고 아메바가 되고 병신이 되고 숫자가 되는데도 했다. 모든 명사에는 '개'가 동사에는 '처'가 붙어나왔다. 침대 위에 핸드폰을 패대기쳐도 화는 풀리지 않았다.


아 지겹다.

너무 지겹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나도

더럽게 말을 못 알아처먹는 너도


밉다.

아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나도.

이런 말을 하게 만드는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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