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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과나 Aug 13. 2023

지겹지만 다시 한번


집을 나왔다. 무작정 걸었다. 마음이 답답해서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은데 이런 얘기를 할 사람은 남편밖에 없다. 이 세상에서 이 이슈를 나만큼 진지하게 받아들일 유일한 사람이다. 하지만 약속이 있어 나간 사람이라 굳이 전화해서 좋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았다.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이제 귀가 지하철을 탔다는 연락이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나 불안할 때 표정, 목소리, 숨소리에서도 그것이 드러나는 사람이다. 남편은 대번에 내 낌새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채고 무슨 일이 있는 물었다.


'아니야. 아무 일도 없어' 라고 답했지만 축처진 목소리에서 이미 뭔가 있다는 걸 알아챈 남편이다. 내릴 때가 다 되어 다시 연락했다. 항상 같이 걷던 산책로를 그는 올라오고 나는 되짚어 내려가 만났다.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묻기에 집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남편은 이런 일이 있을 때 세게 반응한다. 보통 아이가 부모 중 한명에게 혼이 나거나 갈등이 있을 때 아이와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다른 부모는 감정이 얽혀들지 않았기 때문에 중재하는 역할을 맡아주면 좋겠는데 남편은 그럴 때 나보다 더 아이를 잡는다..


처음엔 아무 것도 해주지마,로 시작했다. 전화기 뺏고 운동도 시키지 말고 학원도 보내지 말고 사달라는 옷도 사주지 말라고. 나는 그런 식으로 해서 아이를 바꿀 수는 없다고 했다. 결국은 아이가 변할 때까지 믿어주고 북돋아주는 것만이 부모가 해야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오늘은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폭발해버렸고 믿어주기도 지쳤으니 당신이 중간 역할을 해달라고. 여기서 더 애를 잡지 말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는 뭘 두려워하는 걸까? 아이가 끝내 제 몫을 하는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우리한테 얹혀살까봐 걱정하는 걸까? 어차피 '학교 공부 잘해서 좋은 회사 취직해서 잘먹고 잘 산다'는 전략은 현재에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아이가 사회에 나갈 때에는 어떤 사회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데."


그리고 슈가 가진 장점도 많잖아. 다정하고 다른 사람을 챙기고 사교적이지. 현재를 즐길 줄 알아. 걱정이 적고. 결국은 가장 인생을 즐기며 살 사람이 아닐까 싶기도 해. 내가 재작년에 점 보러 갔는데 슈가 우리 가족들 중에 제일 사주가 좋대. 군대 갔다오면 정신차리는 케이스가 이런 애라고. 어른이 되면 빨리 집에서 내보내라고. 집에서 끼고 살면 자기가 가진 걸 다 못 펼칠거래. 


남편은, 우리는 아이가 공부를 못해서 혼내는 게 아니고 제몫의 할 일을 안 하려고 하고 유튜브, 게임 같은 쉬운 즐거움에 매몰되어 제대로 된 사고를 할 힘을 못 키우는 게 문제인 거라고. 그것에 대해서는 물러설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아이 성적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지금 아이가 학교라는 곳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성실함과 자기관리 능력을 보여줄 영역이 하루하루 성실히 공부를 했는가일 수밖에 없어서 우리가 헷갈리는 거라고.


맞는 말이다. 우리는 다시 전선을 가다듬어야 한다. 자기 머리로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 아니 키운다는 말은 오만이고 자기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도록 도와야한다.


남편은 중간고사 최고점이 수학 75점인데 아들에게 잘했다고 한 것에 대해 다시 지적했다. 그 점수를 잘했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거다. 현실을 직시하게 해줘야 한다고. 그 점수로는 니가 원하는 곳, 니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할 수 없다고 알려줘야 한다고.


내가 그 얘기를 왜 안 해. 요리 특성화고 가고싶으면 결국은 성적이 좋아야 한다고 말했어. 그랬더니 임팩트가 없게 말했단다. 여보세요. 어차피 사람은 밖에서 들어온 말로는 바뀌지 않아. 변화는 안에서 시작되어야 진짜야. 우리는 대화도 하고, 책도 읽고, 같이 놀기도 하고, 좋은 것도 먹고, 더 넓은 세계도 보여주면서 그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지치지 않고 계속 믿어주는 것만이 관건인거지.


당신도 내가 돈 아껴쓰라고 아니면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우리 결혼 생활 내내 말했는데 나보고 돈돈거린다면서 싫어했잖아. 그러다가 돈 때문에 고생하고 비참해지니까 그제야 돈이 중요하다는 걸 절감했고 지금은 유튜브로 경제 관련 콘텐츠도 보잖아. 내가 십년동안 했던 말들이 당신을 변화시켰어? 사람은 말로는 안 바뀐다니까?


그리고 내가 필라테스 선생님들의 교수법에서 느끼는 점이 많아. 엉망으로 하고 있는데도 고쳐야 할 부분을 알려주면서 고치면 '그렇죠~' '그거죠' '좋아요'라고 한다고. '왜 이렇게밖에 못해요!'라고 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해주고 싶었던 거야. 뭐 하나라도 잘 한 부분이 있으면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고 싶었어. 거기서 시작할 수 있도록.


거짓말은 당신도 어머님한테 많이 했잖아. 나는 범생이였으니까 거짓말 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치고 당신은 왜 슈를 이해해주지 않는 거야? 자기도 어릴 때 공부 못했으면서 왜 공부 못 한다고 애를 잡는지도 이해가 안돼. 나도 어릴 때 공부 못 하긴 했는데 당신은 더 늦게 정신 차렸잖아. 내가 뭐라고 해도 당신은 애를 두둔해줄 수도 있지 않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걷다보니 12시가 다 되어간다. 큰 아이가 전화를 했다. 스터디카페에서 이제 집에 돌아왔다는 인사다. 슈는? 물었더니 집에 오는 길에 뛰면서 운동하고 있는 걸 봤다고 한다.


슈에게 욕을 하고 집을 나오면서 전화기, 노트북 다 두고 가니까 니가 선택해라. 또 잠시의 즐거움을 위해 유튜브를 보고, 게임을 하든가, 아니면 처자든가, 할 일을 해놓든가. 밖에서 운동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약속한 시간 동안 머시멜로를 먹지 않으려고 머시멜로를 외면하고 다른 생각을 한 아이처럼 집에 핸드폰과 노트북이 있으니 나가 있나 싶었다.


남편에게 나는 오피셜리 계속 화난 상태로 있을테니 당신이 잘 다독여주라고. 그리고 슈는 누가 추궁하면 한마디도 말대꾸를 못하는 아이니까 혹시 애가 입 다물고 있더라도 폭발하지 말라고. 그런 얘기를 하고있는데 아이가 전화를 했다. 나는 오피셜리 계속 화가 난 상태니까 전화는 받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서도 아이는 보지 않고 내 방에 들어가 앉았다. 아이는 할 일을 해놓고 운동을 했다고 한다. 남편이 아이를 잘 다독였다. 아이가 편지를 써왔다. 반성문일지도.


아이가 크게 잘 못한 일이 있을 때마다 니가 뭘 잘못했는지 써오라고 시켰는데 그때마다 내용이 참 지지부진하고 엎드려절받기 짜증이 났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자기가 먼저 편지를 써왔다. 그리고 마음에서 우러나서 쓴 글이었다.




엄마 맨날 거짓말 하고 실망시켜서 미안해


엄마 가고 나서 


내가 지금까지 엄마한테 했던 말들이 다 이상하더라


칭찬 받을 짓 안했는데 칭찬 안 해준다고 했고


이미 기회를 많이 줬는데 기회도 안 준다고 했고


오늘부터 정신 차리고 거짓말 안 할게


미안해 엄마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금요일에는 학급활동이 있었다. 밤에 불꺼둔 학교에서 귀신놀이 하고, 떡볶이에 피자를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다. 하루종일 학교에 있다가 9시 반에 마쳤고 다시 친구들과 한 시간을 더 논다고 해서 허락해줬더니 10시 반에 왔다. 씻고 먹고 그제서야 문제를 풀기 시작하니 또 새벽이다.


문제를 풀고 채점까지 했다. 여전히 많이 틀렸고. 우리의 할 일은 틀린 문제를 다시 풀어 익힌다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원래라면 다 풀고 자야하는게 맞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아이의 학창생활에 작지 않은 즐거운 추억인데 초를 칠 수 없었다. 아이가 허락을 구할 때 합리적으로 대해야 다음에도 허락을 구하고 서로 믿고 의논하는 관계가 된다.


다시 한번 채점 후 과정은 '내일'로 넘어갔다. 내일하겠다는 아이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는 니가 말하는 내일을 믿지 않아. 너에겐 오직 오늘만 있는데 너는 오늘 좋은 선택을 하는 방법을 아직 모르는 것 같거든.


아이는 이제는 다르다고 장담을 하며 자러 갔다. 일어나면 바로 어제 못했던 걸 할 거고 낮에 놀다가 밤에는 토요일 분의 공부를 할 거라고.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조금 부족하더라도 나는 다시 한번 아이를 믿어주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다시 돌아가서 나는 내 인생을 잘 살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계속 에너지를 얻어 아이의 인생은 아이의 것으로 분리해두고 믿어주고 기다릴 수 있을테니까.


그러니 나는 계속 읽고 쓰고 덕질하며 내 인생을 잘 사는 걸로 한다.


기승전 덕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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