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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과나 Aug 17. 2023

하나의 고개를 아이와 함께 넘은 날


태풍의 여파로 오랜만에 날이 선선해져 남편과 함께 1만보 코스를 걸었다.


걷고 들어오니 아들은 또 거실에서 PS5를 붙들고 있었다.


걸으러 나가면서 할 일을 해두라고 했던 남편은 아이가 그러고 있는 걸 보고 화를 냈다.


아이는 아이대로 낮에 할 일을 해놓고 이제 막 쉬려는 참인데 잔소리를 듣자 뾰족해졌고 그 때문에 태도가 좋지 않다고 또 혼났다.


우리집 기둥이의 모토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했지?!'이기 때문이다.

검지를 세우고 기둥이의 성대모사를 하는 게 우리집 밈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아빠에게 불만이 쌓여있었다. 아빠가 어디 나간다고 하면 제일 먼저 꼬리치며 달려가 배웅을 해주었다. 아빠가 집에 있으면 아이에게 입을 많이 대기 때문이다. 방 정리 정돈을 해라, 냄새가 나니 씻어라 주로 두 가지주제다. 백 번 맞는 말이지만 언제 어떻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


게다가 아들방에 들어온 운동기구로 턱걸이를 하러 평소보다 10배는 더 아들 방에 자주 들어가다보니 평소보다 10배는 더 아이방의 상태에 대해 입을 댔을 것이고, 그로 인한 아이의 스트레스도 계속 쌓여갔다.


한 번 발동이 걸린 남편은 남편대로 요리를 하고 싶다는 녀석이 요리 관련 자격증을 딴다면서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 딱 60점만 넘어서 합격하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게 글러먹었다고, 그런 생각을 아이에게 불어넣은 엄마는 또 무슨 생각이냐고 쏘아붙였다.


전투의 지형이 확대되는 순간이다.


평소 남편은 아이에게 다정하고 장난치는 친근한 아빠다. 하지만 종종 짖궂은 장난을 쳐서 아이가 짜증을 낼 때까지 간다. 짜증을 내다 선을 넘으면 아이가 학생으로서 부족한 부분을 다 끄집어내 융단폭격을 퍼붓는다.


자기 입장만 생각하던 아이는 40대 아빠의 눈에 비친, 아빠의 입으로 재구성된 자신의 모습을 듣고 눈물을 흘린다. 꺼이꺼이. 하지만 이건 엄마나 아빠의 생각이고 너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냐고, 너 자신을 변호해보라고 하면 말 한마디 못하던 아이였다.


그런데 어제는 아이가 꺼이꺼이 울면서도 뭐라고 입을 떼보려고 옹알이를 했다.


남편에게 당신은 왜 중간이 없냐고, 장난을 치거나 혼을 내거나 극단을 오가지말고 차분히 아이의 말을 들어보라고 했다.


엄마아빠가 자기 말을 들으려고 눈을 맞추자 아이는 꺼억꺼억, 흐이흐이 울음을 삼키면서도 한 마디씩 자기 입장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빠의 짖궂은 장난에 대한 자기 태도, 자기 생활에 대한 아빠의 지적, 학생으로서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한편, 아빠가 자기를 혼내기 시작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고 한다.


아빠가 혼내는 패턴, 그럴 때 자기가 느끼는 감정, 그리고 머리가 커짐에 따라 아빠가 한 말이 앞뒤가 안 맞거나 모순이 있다는 걸 생각하게 되면서 아빠에게는 버릇없이 보였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 등등.


유튜브 숏츠 영상에 오염되어 녹아내린 뇌인줄 알았는데 글 한 자 써놓지 않고도 저렇게 선명하게 정돈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니 이걸 제 때 표출하지 못했으면 어쩔뻔했나 싶었다.


아빠는 아들의 말을 듣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아이의 말 중에 나도 반성할 것이 있었다.


엄마는 언제나 너에게 원하는 건 변한적이 없다고 말하는데 자기가 느끼기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운동을 빼먹고, 엄마 아빠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PC방에 다니고 하던 1년 전의 자기자신과 비교하면 분명히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데, 조금 더 공부를 챙겨서 하기 시작했는데 엄마는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고. 자기가 1만큼 나아지면 엄마의 기대는 2만큼 올라가서 항상 모자라게 느껴진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기가 맥힌 비유를 했다.


내가 키 크는 걸 엄마아빠가 매일 알아차리지는 못하잖아요. 그러다 어느 순간 엄마보다 커졌네? 하고 알아차리는 날이 오는 거고. 그러다 아빠보다도 커졌다고. 나는 매일 나아지고 있는데 엄마아빠가 그걸 아직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그런데 그걸로 나를 혼내니까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그래서 나도 사과했다. 미안하다.


니가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니가 당연히 해야할 일의 수도 많아지고, 엄마아빠의 기대 수준도 높아진다. 하루 두 페이지, 문제를 풀고, 채점을 하고 모르는 것을 공부한다는 원칙은 바뀐 것이 없지만 그 일을 해내기 위해 너에게 요구되는 능력과 그 일을 해내기 위해 필요한 노력의 양과 시간은 매년 더 커지고 있다고. 


엄마는 전자를 얘기하고 너는 후자를 느끼고 있으니 일어난 혼란이라고. 다시 말하겠다고. 세상은 하나의 공을 저글링하다가 그게 익숙해지면 두 개의 공을 저글링하기를 다음엔 세 개, 그 다음엔 네 개를 안정적으로 돌리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엄마가 느끼기에 너는 저글링하는 공의 갯수를 늘리려하지 않는 것 같다고. 거기서 너와 내가 평행선을 긋고 있는 것 같다고.


아빠와 아이는 서로 속마음을 이해하고 서로에게 터치하지 않아야 할 부분, 서로 지켜야 할 부분을 합의했다.


그런 와중에 나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엄마, 나는 엄마랑 같이 공부하고 싶어요. 나 원래 누구랑 같이 공부하는 거 좋아해요. 그런데 엄마는 맨날 나 글 쓸거야, 나 시간 없어, 막 이러잖아요.


나 서운해요. 

그,그,구뤠?

나 그러면 어떻게 해? 

하루에 한 시간 엄마랑 공부해?


엄마가 나 모른다고 혼내고 짜증 내지만 않으면 한 시간 반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아빠와 아들은 화해를 하고, 엄마는 하루가 23시간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


그래도 울면서 시작했던 이야기를 웃으면서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미국 갔을 때 고모부님이 어찌나 슈를 칭찬하고 기를 살려주셨던지 아이가 신이 나서 이야기도 잘 하고 농담도 하고, 목소리에 실린 힘도 느껴지던 날들이 기억났다. 

공부고, 습관이고, 그런 잣대 없이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던 순간 슈의 표정도.



그래, 네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도록 서로 애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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