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놀라 홈즈>와 밀리 바비 브라운
세상 모든 독서가에게는 '셜록 홈스기'가 있을 것이다. 그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일러스트가 잔뜩 들어간 축약본 탐정소설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매부리코에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고 사냥용 모자와 망토 달린 외투를 입은 남자가 그 안에 있다.
-이다혜, <코넌 도일> 11,12p
상상 속 런던의 거의 모든 것은 홈즈와 관련이 있었다. 적어도 버지니아 울프를 읽기 전에는.
나의 '셜록 홈스기'는 90년대 초에 운명적으로 만난 축약본 어린이 문고를 거쳐 2000년대 중반 한글판 전집에 흠뻑 빠져있던 그 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홈즈가 그 자리에서 읽고 싶어져서 베스트 단편집을 충동구매한 적도 있고, 전집을 정주행한 뒤 여운을 다스리지 못해 몸살을 앓았던 기억도 생생하다.
어쩌면 홈즈적인 요소를 이어받은 다른 이행대상을 끊임없이 덕질하는 것이 내 사생활의 거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나는 홈즈와 묘한 경쟁관계에 있는 빌런인 듯 빌런 아닌 빌런 같은 아이린 애들러와, 같은 ENTP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는가. (그게 ENTP의 본질이다. 배트맨의 아키에너미, 조커도 ENTP이다.)
아이린 애들러에 집착할 수밖에 없던 홈즈 덕후들에게 희소식이 생겼다. 셜록 재단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사실 높은 확률로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원작에 없던 셜록 형제의 여동생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니까, 셜록 서사에서는 잠깐 등장하는 아이린 외에는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가 없었기 때문에 셜록을 각색한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어떻게든 아이린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낸시 스프링어의 <에놀라 홈즈>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의 밀리가 <에놀라 홈즈>의 영상화를 추진했다! 다만 셜록 홈즈 시리즈 원작과 영화 <에놀라 홈즈>는 장르가 다르다. 영국 드라마 <셜록>이 현대물이고 영화 <셜록 홈즈>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인 것을 감안해도 한참 더 가야 한다. 일단 셜록의 이야기가 아니다.
셜록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에놀라와 함께 '홈즈가의 여성들'로 등장하는 에놀라의 엄마 유도리아 홈즈는 최초의 페미니스트 중 한 명으로 설정되었다. 모녀의 동선을 따라 19세기 여성들의 삶을 엿볼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영화로는 한계가 있었다. 낸시 스프링어의 원작을 읽지 않았기에, 한국 영화 <아가씨>의 원작인 새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와 핍 윌리엄스의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에서 묘사된 배경을 떠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헬레나 본햄 카터와 밀리 바비 브라운이니까. 스토리의 몰입감이 아쉽긴 했어도 볼거리는 충분하니까. 팬데믹을 만나 극장 개봉을 포기한 것이 다행일까 불행일까. 아직 보지 않은 사람에게 추천할 명분은 많지 않지만, 그중 하나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막 최애 배우는 아니더라도 20년 지기(?) 또는 그 이상인 헬레나 본햄 카터는 믿고 봐도 된다. 그리고 우리의 밀리! 일단 밀리의 서재가 한 건도 아닌, 두 건을 했다. <기묘한 이야기> 파일럿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밀리. 아직 어린이였는데 삭발을 해서 무성적 존재로 보였던 밀리.
<리벤지>의 씬 스틸러, 가브리엘 만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대표작이자 이번 미드 리뷰의 시작이었던, <본 아이덴티티>에 등장하는 아주 짧은 머리의 20대 같은 30대 초반 가브리엘 만이 밀리 바비 브라운의 첫인상과 아주 많이 닮았다. <기묘한 이야기>에서 폭풍성장하면서 사춘기와 하이틴, 그리고 곧 성인이 될 모습까지 지켜봤는데도 여전히 밀리의 얼굴에는 시크한 미소년이 남아있다. 내게는 그것이 최대 매력포인트.
에놀라 홈즈라는 인물은 다르게 접근했겠지. 역사적 또는 전설적 인물은 오히려 <기묘한 이야기>의 일레븐(제인)에 해당하는 이야기. 밀리 본인에 더 가까운 성격인, 에놀라는 그냥 시대를 초월하여 친근감을 주는 이웃집 소녀 이미지다. 그래서 살짝 느와르 미스터리가 난무하는 지능게임을 기대했다면 다소 주춤하거나 산만해질 수 있음주의. 의외로 밀리와 홈즈의 조합은 하이틴 로맨스였다!
이미 에놀라를 거쳤던 <기묘한 이야기> 시즌4의 밀리는 기존의 격리된 아이를 (나름) 벗어나, 너드지만 청소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여전히 밀리가 나는 너무 좋은데, 그녀가 남성 청소년 캐릭터와 썸타는 모습은 좀 어색하게 느껴진다.
<기묘한 이야기> 작품 내외에서 맥스 역의 새디와 함께한 모습이 더 자연스럽고 행복해 보인다. 인터뷰에 의하면 밀리와 새디는 남성 청소년 배우들과도 친하다. 그러나 다들 진짜 사춘기에 촬영을 해서 진짜 현실 사춘기 느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진짜 하이틴 로맨스는 성인배우들이 출연하니까.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