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고담>과 영화 <다크 나이트>
시작은 고양이였다.
아니지. 이 드라마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배트맨 비긴즈>와 같은 세계관 속, 비슷한 시대를 다룬 작품(디테일은 다름)인 것은 몰랐다. 일단 <배트맨>의 탄생설화를 몰랐다. 심지어 <해리포터>를 보기 전이었고 판타지에 별 흥미가 없었다.
아니지. 일본 애니메이션의 판타지에 어느 정도 발을 담갔다 뺀 후로는 스릴러와 가끔 디스토피아, 주로 (그런데 당연히 웰메이드) 막장 드라마를 봤다.
뉴욕 드라마 중에서 좀 알려진, 또는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작품들을 차례차례 털다가 마침내 말로만 듣던 <고담(2014-2019)>에 이르렀다. 엄밀하게는 뉴욕이 아니지만, 평행우주의 뉴욕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시즌이 공개되기 전, 오프닝에서 입덕해 간보지 않고 정주행을 다짐했다.
길냥이를 위해 소매치기를 하는 인간 길냥이, 셀리나에게 사로잡혔다. 셀리나는 웨인 가족 살인사건이 발생한 처참한 골목에서 목격자로 등장한다. 그래서 <고담>의 센터 짐 고든을 거쳐 브루스 웨인과 친구가 된다. 그녀가 바로 그 유명한 캣우먼이 될 상이었다. 시즌1에서는 브루스와 셀리나가 갓 사춘기인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이들은 필연적으로 5년 동안 폭풍성장을 한다. 시즌제 미국 드라마의 매력 중 하나는 확실히 잡고 시작한다.
강력반 형사 짐 고든은 살인 사건을 수사하다 이 구역의 짱인 피쉬 무니를 만난다. 느와르 뉴욕의 대장 몬스터는 따로 있지만 베일에 싸인 마피아가 아닌, 드러난 빌런으로의 피쉬 무니에게 사로잡혔다. 셀리나를 버린 것은 아니지만 아직 셀리나가 어리기 때문에 줄 수 없는(?) 것을 피쉬 무니가 줬다. 나쁜 여자를 보면서 느끼는 대리만족.
그런데 펭귄이 나타났다.
펭귄은 그로데스크하게 웃기지만 드라마 <고담>의 오스왈드 코블팟은 일단 잘생겼다. 그는 피쉬를 제거하고 그녀의 자리를 꿰찬 것도 모자라 범죄자 출신이라는 컴플렉스 또는 스펙을 딛고 고담시장이 된다. 피쉬는 강렬하지만, 밀려나는 캐릭터인 데다 서사가 좀 약했다. 그래서 내 마음속 센터는 펭귄이 됐다. 배트맨이 각성할 때까지 고담시티는 점점 더 폐허가 되어야 하므로 짐 고든은 동네북이고, 브루스 웨인과 (조커가 될) 제롬은 아직 어린 데다 서서히 스며들어야 한다.
피쉬로 대표되는 (별 초능력이 없는 조폭출신) 구세대 빌런, 배트맨과 조커를 잉태하는 돌연변이 신세대 빌런을 연결하는 자가 펭귄이다. 피쉬 또는 (고든의 아내가 될 예정인) 리 톰킨스 둘 중 하나를 포함한 5대 여성 빌런도 있다. 셀리나, 펭귄의 원수 타비사, 고든 전 여친 바바라가 3대 빌런, 여기에 포이즈 아이비와 피쉬, 피쉬 사후에는 리 톰킨스.
<고담>은 배트맨, 그러니까 슈퍼 히어로의 성장 배경과 당위성을 보여주기 위한 빌런 대잔치다. 그래서 배트맨이 배트맨이 되는 순간 끝난다. 여운이 말도 못 하게 오래갔다. 정확한 순서는 헷갈리지만 <고담>이 이토록 강렬한 것으로 보아 <섀도우 헌터스>를 먼저 본 것 같다. <섀도우 헌터스>는 그냥 뉴욕에 섀도우 월드가 포함된 어반 판타지다. 책으로 읽은 <트와일라잇> 영상화가 실망스러울 것 같았는데, 책을 읽지 않은 <섀도우 헌터스>는 <고담>과 마찬가지로 오프닝에 사로잡혀서 재미있게 봤다.
<고담> 이후로 한동안 평범한 막장(?) 드라마를 볼 수 없었다. 자극의 역치가 너무 높아졌다. 거의 1년이 다 되어 <오펀블랙>을 시작했고, 오랜만에 오프닝에 사로잡혔다. 아, 오프닝 또는 파일럿(샘플 기능을 하는 시즌1의 첫 에피소드)에 사로잡혔다고 다 정주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잘 보다가 갑자기 흥미가 뚝 떨어진 <왕좌의 게임>도 있었고, 다른 이유로 지루해졌던 <로스트>도 있었다. 중간에 쉬다가 완주한, <앨리어스>와 같은 크리에이터가 제작한 <로스트>는 내 기준으로 결정적 한방이 부족했다. 또는 내가 너무 늦게 접했다. <왕좌의 게임>은 반대로 내가 너무 일찍 접했다. 판타지와 서양 사극(?)에 대한 면역이 없었을 때라 집중을 할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고담>은 제대로 백신이 되었던 작품이다. <오펀 블랙>이 대표하는 느와르 디스토피아, <블랙리스트>와 <킬링 이브>처럼 판타지 없이(?) 그럴듯한 허구적 스릴러, 세계가 점점 뒤집히는 <리버데일>과 <사브리나의 오싹한 모험>, 그리고 이 모든 병맛을 모아둔 <기묘한 이야기>까지.
저 수많은 에피소드를 달릴 수 있었던 코어에 다름 아닌 <고담>의 여운이 있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