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 <버지니아 울프 디 에센셜>
백 년이 지나면 이 가치들은 완전히 변하겠지요.
더욱이 앞으로 백 년이 지나면, 집 문 앞에 이르러
생각하건대, 여성은 보호받는 성이기를
그만둘 것입니다. -143p,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의 권위에 약간 질려있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통해 그녀를 얄팍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에 은밀한 허영심을 가지고, 기억도 못하면서 단지 한번은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한없이 미루고 있는 브론테 자매나 제인 오스틴처럼 그냥 아는 작가 리스트에 포함시킨 것으로 약간의 만족을 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덧: 이 글을 쓴 후 자극을 받아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의 대표작을 영어로 다시 읽었다.)
권위는 스스로 주장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후손들이 그녀를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에 나는 버지니아 울프가 교조적인 사람일 거라고 오해했다. 죄없는 당사자가 교주처럼 느껴지는 것도 명성의 부작용이다. 명성에 집착하는 사람은 타인의 명성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내심 그가 거만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일단 버지니아 울프 그 자신은 다만 스스로가 엄청난 행운을 누렸음을 알았을 뿐이다.
나 역시 누구보다 간절하게 원하는,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고 지혜와 경험으로 뛰어넘는 여성 작가, 예술가, 모험가들을 100년 전의 버지니아 울프는 가능한 많이 발견하려고 했다. 여러번 언급할 정도로 소중했던 100년 후 여성들의 미래인 현재는 만족스럽지 않지만 고전의 매력 중 하나는 동기부여다.
100년 전에 이런 생각을 하고
글을 썼다면 지금은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현실이 이토록 안타까운 것에 대한 자책과 반성은 그만두기로 했다. <자기만의 방>을 미리 읽었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어떠면 더 잔혹하게) 겪어야만 했던 나만의 전쟁이 있었다. 삶이라는 장기전은 두배를 살고 나서도 훨씬 더 길게 느껴지는 바, 그 시절 정성들여 심어놓은 씨앗이 오랜 숙성을 거쳐 이제 막 싹이 트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읽고 쓰는 맛과 힘을 알았던 소녀는 즐기고 휘두를 준비가 된 여성으로 돌아왔다.
여성이 남성들이 쓴 픽션에서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녀를 최고로 중요한 인물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매우 다양하며, 영웅적이거나 비열하고, 빛나거나 천박하며, 무한히 아름답거나 극단적으로 가증스럽고, 남성만큼 위대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 생각엔 남성보다 더욱 위대한 인물이니까요. 그러나 이것은 픽션에 나타난 여성입니다.
-151p, 자기만의 방
문학은 사리분별을 넘어설 정도로 타인의 의견에 신경 쓴 사람들이 파멸한 잔해로 온통 뒤뎦여 있습니다. -174p, 자기만의 방
글쓰기에 놀라운 자질을 가진 여성조차 책쓰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며 더욱이 정신이 분열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우리는 여성의 글쓰기에 대해 만연한 적대감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189p, 자기만의 방
그러나 그 두 여성 간의 관계가 좀 더 복잡했더라면 그것이 얼마나 흥미로웠을까요? 문학 작품에 나타난 여성들 간의 관계는, 문학 작품에 전시된 빛나는 허구의 여성들을 재빨리 회상하면서 생각하건대, 너무나 단순합니다. 아주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고 시도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읽어 본 가운데 두 여성이 친구로 묘사된 경우가 있었는지 기억해 보려고 했지요. -225p, 자기만의 방
만약 여성이라면 또한 그녀는 종종 갑작스러운 의식의 분열에 놀라게 됩니다. 이를테면 화이트홀을 따라 걸으면서 자신이 그 문명의 타고난 계승자가 아니라 그 반대로 문명의 변두리에 서 있는 이질적이고 비판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듯이 말이지요. -253p, 자기만의 방
자기 방에서는 기묘한 자기 기질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과거 경험을 억지로 떠올리는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288p, 런던 거리 헤매기
현대 생활을 뒤덮은 온갖 흉측한 이상 생성물, 화려한 행렬과 관례, 음울하고 장엄한 의식은 갑자기 터져 나온 웃음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한다.
-343p, 웃음의 가치
동시대인의 글을 읽을 때는 은밀한 허영심이 개입될 수 없고, 그들이 경탄을 자아낸다면 그것은 대단히 열렬하고 진심에서 우러난 것일 수밖에 없다.
-356p, 서재에서의 시간
이곳을 우리는 홀로 가고 그 편을 더 좋아한다. 늘 공감을 받고, 늘 누군가와 동행하고, 늘 이해를 받는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370p, 질병에 관하여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실재하는 경험이었지요. 당시의 여성 작가에게 반드시 닥칠 경험이었습니다. 집안의 천사를 죽이는 것은 여성 작가가 해야 할 일이었던 겁니다. -448p, 여성의 직업
지금이라서 버지니아 울프가 지루하거나 어렵지 않다. 우리 모두의 산책덕후 영국언니, 제인 오스틴의 미래였고, 우리라는 미래를 꿈꾸었던 그녀가 오늘도 멈추지 말라고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