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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y 18. 2023

두 개의 무덤: 새드엔딩 이후의 현실

정보라의 <저주토끼>와 그 후 일년

등장인물(혹은 등장토끼 혹은 등장로봇)들은 사랑하거나 기뻐하기보다는 주로 좌절하고 절망하고 분노하고 욕망하고 분투하고 배신하고 배신당하거나 살해하거나 살해당하는 방식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세상과 교류한다.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326p, 작가의 말




작년 5월에 읽은 책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여러번 수정한 독서계획에 따라 <코넌도일 X 이다혜>를 읽고, 반쯤 읽다가 방학중이었던 <에드거 앨런 포 단편집> 원서(중에서 분명 도일이 엄청엄청 좋아했을, 아이린 애들러의 프로토 타입이 등장하는 작품 포함)도 조금 읽고, 한국소설 <저주토끼>에 수록된 단편 '저주토끼'를 읽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불면증을 동반한 흥분상태가 가라앉고 싫어증이 발동하려던 시점이라 두번째 단편까지 한참을 쉬었다. (사실 중단편 소설집인줄 모르고 소망상자에 넣어두었다가 생일 선물로 받게 된 책이었지만, 어쩌면 그것이 전화위복. 어쨌든 표제작 '저주토끼'는 세 번 정도 읽은 것 같다.)


에드거 앨런 포의 호러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단편 '저주토끼'에 마음을 뺏겨있었는데도 다른 루틴들을 갑자기 하기 싫어져서 잠시 미드(는 뭘 봤더라? 올해는 <환혼>을 봤는데. 미드아님주의.)속으로 현실도피를 하던 어느 날, 또 갑자기 맛있는 브런치를 먹고 단편 4개를 읽고 작가의 말을 읽었다. 아직 반도 안 읽었는데(10개의 중단편 중에서 5개 단편을 읽었지만 중편인 '흉터'는 후반부에 있으므로) 갑자기 작가의 기획의도 같은 것이 궁금해졌다. 그렇게 펼친 '작가의 말'에서 빵터진 나는 이 소설집의 저자후기를 역대급 저자/역자후기의 (내맘대로)명예의 전당에 올리기로 마음먹었다. 어쩐지 한국적이지만 어쩐지 러시아 인형같은 '등장토끼 혹은 등장로봇'의 이미지가 아른거려서 책을 끝내기도 전에 여운속에 잠겨있었다.




발행한지 5년도 넘은 구간이지만 (책덕후라면) 아시다시피 한영번역이 대성공을 거두어 역주행을 하고 있는 작품이고, 앞날개에서 엿볼 수 있는 저자의 글로벌마인드의 실체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1년 전이다. 현재 <저주토끼> 무삭제판과 그동안 묻혔던 정보라의 다른 책들이 연달아서 재출간되고 있다. 올해 생일에는, 성공을 목전에 두고 있는 정보라의 신작 펀딩에 참여해 펀딩 달성자로 길이길이 남게 될(?) 작고 확실한 선물을 나 자신과 저자에게 했다.


한편 이 책을 읽고 있던 어느 날, 또 싫어증을 핑계로 일찍 잠들어있다가 일찍 일어난 주말 아침이었다. 당근이 가득한 냉장고에서 잔뜩 당근먹방에 심취해있는 이름 모를 어린 조카(혹은 어린시절의 나)를 꿈에서 (유체이탈 상태로?) 보고 놀라서, 이 책을 들고 (당근이 나왔으니 토끼책이죠.) 나머지 5개의 중단편을 읽어나가며(둘은 모닝커피와, 둘은 전철에서, 마지막 한개는 무려 머나먼 '사색의 광장'에서) 내 안의 (쓸쓸하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한국여자와 에드거 앨런 포의 거리를 단숨에 좁혀버린 정보라 작가를 생각했다. 그녀가 반했다던 동유럽 신화들도.




우리는 이미 '해피엔딩' 이후의 현실적인 문제들에 익숙해져 있다. 세계대전(보다는 식민지와 내전)이후로 이렇다할 호황(혹자는 90년대 초중반을 벨 에포크라 기억할지 모르겠으나 난 초딩이었고)도 없이 독재와 독점을 반복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로맨스란 사치이며, 다이아몬드 반짝 + 눈물 글썽할 프로포즈 클리셰조차 성립하지 않는다. 저놈의 프로포즈 씬을 볼때마다 감동받는 외국여자들을 보면 한심해서 견딜수가 없지만 그렇다고 그런 감동할 권리조차 없는 한국여자가 '덜' 불쌍한 건 아니다.


이후에 읽게  큰어머니/큰이모뻘 외국 언니들의 글을 보면 19세기 조선보다 대영제국 같은 잘나가는 강대국들이 여성을 더욱 잔인하게 짓밟은  같기도 하다. 최근 '브리저튼' 외전인 <샬럿 왕비> 봤는데, 영국과 조선 사극의 여성들이  눈에 비교된다. (샬럿과 인수대비를 비교해보자.) 유럽문학, 영어문화권에서 200년째 급진적인 <제인에어> 우리에겐 ' 시대'임을 고려해도  정도는 아니다. 아무리 헬조선이 현재진행형이라 해도 한국 여성은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아버지' 성을   있고, 지금은 어머니의 성이나  3 성도   있다.


흔히 남존여비라 알고 있는 19세기나 그 이전에도 활동 영역이 달랐을 뿐 배우자 또는 연인 관계인 남성과 수직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동양철학을 여성혐오적으로 해석하는 풍조는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파시스트, 독재정권의 영향일 가능성이 더 크다. 한국 사회는 고려시대 이후로 퇴보의 퇴보를 거듭했고(돈 벌면 뭐하나. 가진 자만 더 가지고 박탈감이 커지는데) 어쩌면 '선진문물'로 포장한 강대국의 여성혐오를 수입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언어 컴플렉스 때문에 더디 알게된 백인 남성의 오만함(나, 와 나머지 너희들)은 가관이다. 백인 여성과 흑인 여성들이 치를 떠는 이유를 이제야 알아가는 중이다.


한국에 현존하는 여성 혐오는 상당수가 20세기 미국의 전업주부 이미지(해묵은 여성 무용론을 압축한 자본주의의 산물), 주로 미국 대학가의 잘못된 성교육으로 대물림되는 법조계와 권력자-예비 권력자인 남성 동문들의 결탁(소위 '좋은' 대학 출신일수록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뻔뻔한 가해자들)으로 여성들을 침묵시키려는 시도 등이다. 미국, 유럽 문화가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고 모든 혐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짜 조선의 계급의식은 그야말로 고리타분한 것이고 나이에 따른 서열(너 몇살이야?)도 일제 이후에 등장했다. 서양과 다른 조선의 문화를 반영하는 경구도 있다. '여자 말을 잘 듣자.'와 '엄마가 보고 계셔.'는 대략 20세기 후반 이후에 등장한 속담(?)이지만 여성을 지배하는 것보다, 아들화 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한국 남성들이 알고 있다는 증거. 이런 사상은 어머니와 기혼 여성을 더욱 고립시킨다. 아직 놀고 싶은 아들에게 통금을 때리는 엄마(같은 아내)는 사감 선생 같은 존재고, 놀이친구들과 분리된 곳에 존재한다. 감시하는 여성은 스스로를 그 곳에 가두고 기꺼이 (연인이 아닌) 엄마가 된다. 그러지 좀 마.




우리는 '새드엔딩' 이후의 현실적인 문제들에 익숙해질 필요도 있다. 이건 어쩌면 해피엔딩 때보다 더 껄끄러울수도 있는 이야기.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더 많이 존재하는 시퀄이다. 총기난사와 인질극과 폭탄테러에서 (수많은 동료를 잃고) 살아남은 경찰이 뺑소니에 치여서 죽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가 너무 스릴러를 작정한 미드의 대본같은가? 그러나 직접 겪어서 알고 있는 나의 역사에도 쓸쓸한 새드엔딩은 수없이 많다. 오랜만에 연말다운 연말을 보낼 줄 알았는데 줄초상이 나고 마녀사냥을 당한다거나, 그렇게 멍든 채로 나이를 먹어도 나아진 것은 없다거나.  


최근 새로 등장한 콘텐츠 중, 가장 뜨거웠던 <더 글로리>의 복수도 마찬가지였다. 복수의 끝은 모든 것의 끝(두 개의 무덤)이거나, 새로운 복수의 시작일 뿐이다. 절대로 '일상'이나 '행복' 따위가 복수심이 빠져나간 그 자리를 채울 수 없다. (행복이야말로 대표적인 유토피아, 집착할수록 바보가 되는) 나의 상실은 목 놓아 외칠 수도 없는 그런 것들이다. 최선을 다해 괜찮은 척을 하는 것 또한 목 놓아 외칠 수 없는 나만의 숙제인데, 살아남은 이들이 이해할 리 없는 이런 약속, 불멸의 사랑에 매여있는 것 또한 새드엔딩인 동시에 네버엔딩인 것이겠지.




짐승의 눈에도 표정이 있다면 그 눈에 나타난 것은, 그가 읽은 것은 분명 만족감이었다. 다만 사람과 달라서 짐승은 상대를 겁주고 괴롭히는 데서 즐거움을 얻지 않는다. 야생 짐승에게 다른 동물이란 내가 죽이거나 아니면 나를 죽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일단 상대가 나를 죽이지 못하게 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를 죽이기 위해 잡아왔다면 상대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그냥 잡아왔다, 이겼다는 그 사실 그대로가 짐승에게는 삶의 만족일 뿐이다.

-224p, 흉터




대신 성공해야 하는 임무가 있다. 삶에 매여있었고 그것을 견디지 못한 사람이 부여한 임무, 더 좋은 것을 양보한 윗세대 여성들이 부여한 임무. 대리만족을 위해 사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철저하게 나를 위한 삶은 처음부터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희망이고, 다만 스스로 깨닫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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