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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May 04. 2023

마르케스를 능가할 국내산 환상문학

정보라 월드의 알고리즘, <여자들의 왕>

여성이 귀신이나 괴물이 되어야만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슬프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277p, 작가의 말


정보라의 <저주토끼> 이후로 호러 판타지에 대한 옛정이 깨어났었다. 그러고보면 전래동화, <무민이야기>와 세계의 민담, 몇년마다 리뉴얼되는 <구미호>, 주로 궁중암투에 관한 사극, <임꺽정>에서 뻗어나간 대하소설까지 내 스토리 취향을 아우르는 대주제가 판타지와 구전문학이었다. 최근 덕질한 <고담>부터 <기묘한 이야기>까지의 미국드라마도 결국 이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리고 정보라 작가를 만나 그 덕심의 코어로 돌아왔다.


넷플릭스 재생목록에 <사브리나의 오싹한 모험>과 <마녀배달부 키키>를 나란히 앉혀두었더니 두마리의 검은 고양이와 동시에 눈을 마주치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된 적도 있었다. 아무렴. 기이하고 천재적인 여성을 마녀로 몰아가야만 속이 시원했을 옛날 사람들 덕분에 스토리 덕후를은 마녀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비하면서, 여성이 초능력을 가졌을때 벌어질 수 있는 여러가지 시나리오에서 쾌감을 느낀다.


이와 같은 시대적 트렌드를 맞아 기묘하게 닮아있는 동유럽-몽고-한국의 전설을 현대적으로, 여성친화적으로 복구하는 정보라의 이야기들은 무심히 빠져들었다가 정신없이 몰입하기에 딱 좋다. 이번에는 그리 무섭지도 않았다. (물론 수년간 연쇄살인범이나 좀비를 데리고 밥을 먹어온 나는 내성이 강하다. 다만 정통 호러물의 '극장 사운드'가 싫을 뿐.) 동서양의 용을 비교해볼 수 있는 이야기도 꿀잼이다. 마침 또 넷플릭스에서 <어두운 그림 왕국의 무서운 그림 동화 이야기>라는 새로운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발견한데다, 갓생 루틴 BGM으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등의 작품을 자주 재생하고 있는데 바로 이 두 작품에 대표적인 서양 용(불뿜는 용)과 동양 용(강의 신, 하쿠)이 등장해서 재미있다.


실크로드 여행기는 드라마 <선덕여왕>과도 겹쳐보이지만, 이 책보다 먼저 읽기 시작해서 더 오래 읽었던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과도 맥이 통한다. 여담으로 여성의 날 책탑에 포함된 <익명작가>와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에는 뉴욕과 업스테이트의 캣스킬이라는 공통 여정이 있다. 엄청 많은 곳을 여행한 건 아니지만 상당한 분량의 레퍼런스가 쌓이다보니, 거의 모든 곳을 간접적으로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든다. 누가 그러는데 독서는 정신적인 여행이라고도 하더라고.


동서양 고전을 사랑하고 그 믹스매치를 꿈꾸는 분이라면, <여자들의 왕>에 수록된 리메이크된 전설들을 통해 판소리 같은 저자의 문체와 현대적인 위트를 맛보는 재미를 놓치지 않기를. 그녀의 다음 책(이미 나왔지만)도 기대된다.   




그래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모두 그렇듯이 이 이야기도 결국은 해피 엔딩이다. 다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종류의 해피 엔딩이 되는지는 끝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본시 이야기라는 건 결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과정이 재미있는 법이니까.

-91p, 달빛 아래 기사와


외국어란 하나쯤 알아둬서 나쁠 것 없고 더구나 배우자가 외국인이라면 그 배우자의 모국어로 기본 회화 정도 마스터하는 것은 생활의 편의라는 측면에서나 인간 된 예의라는 측면에서나 필수다.

-105p, 사랑하는 그대와


그런 조롱이나 경멸의 표정은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것을 누리는 자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배우는 것이다. -187p, 여자들의 왕


미술관에 특별 전시 중인 청동 조상 '승리자'에 장수가 남자로 묘사되어 있는 것은 언어의 불명확성과 일반의 편견에 기인한 오류이다.

-216p,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영원한 불모의 생명에 동반자 따위는 없다.

그저 한정된 먹잇감을 노리는 경쟁자가 하나 늘었을 뿐이다. -270p, 어두운 입맞춤




<마이걸>, <주군의 태양>, <호텔 델루나> 등으로 명가인 홍자매의 드라마 <환혼>에 혼을 뺏겼다. 간신히 예약한 전시를 앞두고 시즌 2를 다 봤는데 계속 이 책이 생각났다. 한국드라마에 여전사가 나온 게 처음은 아닌데, 한동안 그 세계가 후퇴했고 나는 미드에 입덕했고. 이번 여전사는 살아도 사는게 아니고 죽어도 죽지 못해서 더 서러웠다.


그 사이 디즈니플러스엔 내가 20년 동안 애타게 찾던, 사라 미셸 갤러의 <뱀파이어 해결사> 전편이 올라왔다. 올해도 미드가 풍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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