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있는, 이미 지나온 디스토피아
이곳은 보이지 않는 억압 구조의 그물망이
있는 곳-실질적으로 모든 곳이 된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물리적 폭력을 당한 것은 아니라서) 입에 올릴 수 없는 억압과 폭력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현재가 될 수 있다. -505p, 옮긴이의 말
<밀크맨>은 50주년 부커상 외 다양한 국제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김영란, 정희진, 정혜윤, 최은영, 정세랑, 김보라 등 국내 여성 작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국내 추천사는 '관점과 통찰'을 언급하지만 영어권의 <LA 타임스>, <더 타임스>, <아이리시 인디펜던트>는 '표현'에 주목한다.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 역자이자 <밀크맨>으로 유영번역상을 수상한 홍한별 작가의 유려한 번역 덕분에 덜 난해하고 더 쫀득한 문장을 만날 수 있다. 가로로 길게 늘어지는 영어로 이런 문장을 썼다고? 당연히 원서로도 읽어야겠지만 번역서로 빠르게 이 '관점과 통찰'을 통과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본격 전개 이후에는 책을 놓을 수 없었고 그 자리에서 300페이지를 읽었다.
<밀크맨> 원서를 읽는 상상을 해보면 더 즐겁다. 영어는 누적 독서량이 적으니 심장으로 직행하는데 한국어는 여러 층의 의미를 가진 채로 머리속에서 재조합된다. 두 언어의 읽기 속도가 거의 비슷해진 이유가 이것이다. 영어를 그냥 읽고, 한국어를 오히려 해석하기 때문에, 영어의 속도가 오르고 한국어의 속도는 정체한 상태다.
언어화하기 어려운 것들을 가능한 모든 비슷한 표현을 끌어모아 묘사하는 저자 애나 번스는 속사포 랩으로 쓴 듯한 만연체로 호불호가 갈리는 듯. 그가 남성이었어도 어렵다고 욕할거냐? 라는 리뷰도 있었다. 비슷한 만연체를 쓰고 읽는 게 특기인 입장에서 이렇게 말이 많지만 쓸데 없는 말은 안하고, 말이 아닌 말로 표현하는 작가는 동지다.
<밀크맨>의 화자는 지난 세기로 타임슬립하여 18세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젊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숨막힘,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몰랐던 것들에 대한 늦은 후회가 몰아친다.
왜 그걸 참은걸까!
어른도 아이도 아닌 그녀는 주변에 믿을만한 사람, 특히 여성의 부재로 인해 폭력으로 분류되지 않은 폭력을 오롯이 혼자 감당한다. (돌아버리겠다.)
내전 중인 전선, 무명의 디스토피아에 한반도를 대입하는 건 자동반사적이다. 전쟁인듯 전쟁 아닌 비일상에서 일상적 폭력과 고통은 서열화되고 다른 나라, 다른 시대와 비교당한다.
파시즘과 민주주의(의 부재)와 울타리 밖의 페미니즘이 수십년째 비슷한 자리를 맴돌고 있다. 분단 국가와 양쪽 동맹국 전체가 그렇다. 현실을 회피하고 전쟁놀이나 가십 등 다른 무언가에 빠져든다. <밀크맨>은 그 현실을 볼 수 있는 눈이다.
아는 것은 힘이 아니고 안전이나 안도감도 아니고,어떤 사람에게는 힘, 안전, 안도감의 정반대 것일 수도 있다. 예민하게 깨어 있다보면 자극이 계속 쌓여 고조되기 마련인데 그런 스트레스를 해소할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103p
우리가 그의 좋은 행동을 인정하지 못하는 까닭은 그가 누구에게나 불친절하다는 평판이 의식에 너무 확고하게 박혀 있어서 사실로 헛소문을 밀어내려면 의식적인 노력을 엄청 기울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208p
"소문에 따르면"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소문을 만들어서 퍼뜨린 장본인이 아닌 양 소문을 의인화해서 말했다. -252p
내가 아는 세상일이란 우라질 지옥, 우라질 지옥, 우라질 지옥이고 이 표현에 자세한 내용은 안 들어 있지만 이 표현 자체가 자세한 내용이다. -321p
그러니까 사람들은 보통 약간 뒤죽박죽으로 약간 엇갈려서 살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삶이 속수무책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고 원래 그러기 마련인 식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안다는 말이다. -348p
그래놓고도 그는 계속 잘생겼다. 순수함을 읽고 씁쓸함과 신랄함이 가미되어 약간 손상된 잘생김이긴 했지만. -367p
나는 또다시 주의를 듣고 다른 사람이 오해한 것을 내가 반박하고 해명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411p
둔감하게 있지 않고, 상황을 인식하고, 사실을 알고, 사실을 받아들이고, 현재에 존재하고, 어른이 되는 일이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 -426p
사실 이것도 놀이였다. 다락방에 있는 장난감 전장의 장난감 병사와 장난감 기차를 꺼내와서 하는 놀이, 센 남자가 된 십대, 센 남자가 된 이심대, 삼십대, 사십대 남자들이 전혀 장난감이 아닌 것들을 가지고 장남감 놀이 정신 상태로 하는 놀이.
-45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