팻 바커, <침묵은 여자가 되나니>
<일리아스>가 천하의 영웅이요 전사인 아킬레우스, 파트로클로스,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아이아스, 네스토르, 마카온과 같은 쟁쟁한 영웅들이 전쟁터 곳곳을 누비며 드러내는 말과 행동으로 채워진 반면, <침묵은 여자가 되나니>는 전쟁터 뒤편에 숨겨져 있던 여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여인들은 전투를 마치고 막사로 돌아온 남자들에게 밤마다 폭행을 당하고 짓밟힌다. 전쟁의 패배로 순식간에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전리품, 노예로 전락해서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했던 여인들. 브리세이스, 이피스, 크리세이스, 우자, 데크메사, 헤카메데, 릿사의 감정과 말과 행동, 그리고 침묵은 우리에게 익숙한 영웅서사라는 동전의 뒷면을 보여준다. -442p, 해제(김헌)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전혀 모른다면 해제를 먼저 읽어도 좋을 것이다. 헤제를 작성하신 김헌 교수님의 지적대로 <침묵은 여자가 되나니>의 서사는 고대 그리스를 떠나 현대적 리얼리즘의 맥락을 취하며 순전한 '인간들의 이야기'가 되었으므로(444p) 독립된 작품으로 읽어도 무방하고, 등장인물과 배경이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는 <일리아스>의 스핀오프라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어학 교재에서만 접해봤고 <일리아스>와 그 관련작도 말만 들어봤다. 호메로스 처럼 팻 바커도 '지금까지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누구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청중을 '사건의 한가운데로' 곧장 이끌어 가기 때문에(438p) 구구절절한 설명은 없다. 서양 문학과 서양 신화에 대한 컴플렉스(초딩때부터 이과여서 의도치 않게 세계사를 못 배운 자)가 있다면 이런 전제는 흥미로우면서도 불안한 장치로 작용한다. 설명을 해주지 않는 부분은 알아서 알고 있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바로 해제를 읽었어야 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한 권이라기에는 조금 두껍고 세 권이라기에는 아주 얇다. 두껍다고 느껴졌다는 건 지루한 부분도 있었다는 의미다. 한 권짜리 픽션이 600페이지가 넘어야 좀 읽은 것 같고, 800페이지가 넘는 책이 시리즈로 출간되면 더욱 환호하는 장편소설 덕후인데 겨우 400페이지가 조금 넘는다고 투덜거리다니. 약간은 공부하는 마음가짐으로 읽었지만 그 예상을 크게 뒤집지는 않아서(결국 공부거리 이상이 못 되는 책이라) 대체로 만족(?)하면서도 살짝 서운했다. 부커상 수상자인 팻 바커가 깜짝 놀랄만큼 재미있거나 과몰입이 되는 순간을 곳곳에 숨겨두었을거라는 나만의 숨은 기대가 충족되지는 않은 것 같다. (영어로 읽어볼까?)
신화 기반의 소설들을 더 읽어볼 수도 있겠지만 솔직하게 인정하자면, 나는 신화말고 전래동화 취향인 것 같다. 전래동화를 포함한 대부분의 소설과 드라마의 뿌리에 신화가 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신화와 가까워진 것은 다행이지만 역사와 마찬가지로 신화라는 것도 외울 필요는 없고 취향에 따라 취해야겠다는 생각만 확고해졌다. 스토리텔러라면 배경지식의 수준이 다양한 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법.
잊으라니. 그래서 내게는 물그릇처럼 투명하고 단순한 의무가 생겨났다. 기억할 것. -34p
아마 그 나이의 나는 가슴을 뒤흔드는 그 모든 용기와 모험담이 미래로 향하는 문을 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몇년이 지나 열 살, 열한 살이 되었을 때, 세계의 문은 닫히기 시작했고, 그 노래들은 내가 아닌 남자 형제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81p
가끔 나는 밤에 잠들지 못하고 누워서 머릿속 목소리들과 말씨름을 한다. -288p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우리의 노래와 이야기가 우리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트로이 최후의 사내가 죽고 수십 년이 지나도, 트로이인 어머니들이 불러주는 노래를 그 자식들이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꿈속에서 영원할 것이다. 끔찍한 악몽이더라도.
-397p
브리세이스 버전의 스핀오프도 간신히 완독했는데 다른 버전은 더 재미없겠지? 우선 재미있는 책(믿고 보는 정보라) 읽으면서 중화를 하고, 언젠가 매들린 밀러의 원서에 도전해봐야겠다. 매들린 밀러 스타일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팻 바커와 교차대조를 해보셔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