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덕후 뉴욕언니, 로런 엘킨의 에세이
도시에서 거닐고 전복하고 창조한
여성 예술가들
로런 엘킨의 플라뇌즈 탐구서를 무한 재주행할 예정이다. 산책덕후 중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리베카 솔닛, 진 리스, 버지니아 울프, 조르주 상드, 마사 겔혼 등은 각 시대의 대표적인 플라뇌즈였고 크리에이터였고, 작가였다.
산책덕후 영국언니, 올리비아 랭이 뉴욕에서 경험한 것과 비슷하지만 다르게 산책덕후 뉴욕언니, 로런 엘킨은 파리에서 '이방인'이 됨을 경험한다. 엘킨은 보들레르의 '플라뇌르'가 어째서 여성들에게 적용되기 어려운지 들춰내기 시작한다. 우리의 솔닛 언니가 거슬러 올라갔던 제인 오스틴 시대까지 상상하되 파리를 상징하는 조르주 상드와 런던을 상징하는 버지니아 울프, 그밖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집 밖을 나섬'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좌절과 굴욕과 창작의 실마리를 재구성한다.
<도시를 걷는 여자들>에 등장하는 인물과 개념, 특히 뉴욕언니의 시선에 포착된 프랑스어를 '플라뇌즈 노트'에 정리하고 있다. 재독은 더디고, 다른 책의 목차나 예술가들이 노트에 합류했지만 괜찮다. 이 작업, 산책덕후의 레퍼런스 혹은 주석노트 만들기는 적어도 19-20세기 여성들의 문학사와 예술사를 두어번 반복하고,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 여섯 권을 다 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플라뇌르는 남성적 특권과 여유를 지닌 인물형이다. 시간도 있고 돈도 있으나 당장 신경 써야 할 일은 없는 사람. 플라뇌르는 도시 다른 거주민들은 잘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도시를 이해한다. 플라뇌르는 도시를 발로 머릿속에 담았다. -18p, 프롤로그
아니, 프랑스어를 배웠으므로 나는 남성 명사를 여성형으로 바꾸었다. 나는 플라뇌즈다.
-23p, 프롤로그
플라뇌즈는 밖으로 여행을 떠나고 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간다. '가정'이나 '소속' 같은 단어가 그간 여성에게 불리하게 사용되었음을 의식하게 한다. 플라뇌즈는 도시의 창조적 잠재성과 걷기가 주는 해방 가능성에 긴밀하게 주파수가 맞추어진, 재능과 확신이 있는 여성이다. -44p, 프롤로그
걷지 않는 문화는 여자들에게 나쁘다. 걷지 않는 문화가 권위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이게 다 결국 무슨 의미인지,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그 욕구가 충족되는지 등을 고민하지 않는 여자는 가족에게서 벗어나 방황하지 않을 것이다. -64p, 롱아일랜드_뉴욕
리스의 여자들은 게임을 할 수가 없다. 리스의 인물은 비인간적이고 자의적인 규칙, 자기에게 불리한 규칙을 거부한다. 왜 저 여자는 적응하고 사는 척하지를 못하지? -97p, 파리_그들이 가던 카페
울프는 여성의 도시 경험이 남자와 어떤 면에서 다른지를 깊이 의식한다. 이 글에는 런던을 돌아다니면서 (여자들도) 익명성을 누릴 수 있다는 울프의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 -136p, 런던_블룸즈버리
눈에 띄지 않으려고 택한 방법이 상드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 된 셈이니 생각해보면 참 얄궂은 일이다. 크로스드레싱이 오로르 뒤드방을 조르주 상드로 재탄생시켰고, 그 뒤로 상드는 평생 남의 시선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170p, 파리_혁명의 아이들
시위는 정부에게 우리가 반대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 아니라 동료 시민들에게, 그중 가장 약한 이들에게 우리가 국가 정책에 반대할 수 있고 반대해야만 함을 보여준다.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성급한 가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286p, 파리_저항
어디로 갈 것인지 스스로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을 때에 세상은 덜 무서운 곳이 된다.
-347p, 파리_이웃
나는 제인 오스틴이나 브론테 자매가-혹은 헤밍웨이가 아니니까, 당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겔혼은 말한다. 그럼에도 겔혼은 상상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저널리즘은 허구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 삶과 허구 사이에서 밟아야 할 단계다.
-379p, 모든 곳_땅에서 보는 광경
미국인들은 실상 대부분 다른 곳에서 왔는데도 미국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땅에 국가를 수립하는 폭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이런 역사가 있는데도 미국의 소속감이라는 모델이 문제없이 기능할 수 있나? -407p, 뉴욕_귀환
그냥 보는 것, 보면서 다른 것을 보기를 기대하지 않는 게 핵심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전부 다 아는 척하지 않고 늘 약간 안 맞는 채로 있는 게 좋다. -413p, 뉴욕_귀환
버지니아 울프와 로런 엘킨을 만난 이후, 이미 읽고 있었던 리베카 솔닛에 더해 조르주 상드, 진 리스의 저서를 계속 추가하는 중이다. 상드와 울프의 소설들, 솔닛의 산책 시리즈와 맨스플레인 시리즈, 엘킨이 주석에만 작게 적어둔 비비언 고닉의 에세이, 어쩐지 엘킨과는 동선이 겹치지 않는 올리비아 랭...
그녀들을 발견(?)해서 행복했던 2022년을 지나 '산책덕후 한국언니'로 거듭나 내가 왜 산책덕후가 되었는지도 추적(?)하고 있다. 엘킨이나 랭, 솔닛, 울프처럼 역사를 추적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에세이를 쓰다 보면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난다. 나의 동기를 찾아가는 여정은 나의 삶이 요구하는 조건을 알아내고, 내가 끌리는 다른 이-플라뇌즈-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다.
그건 어쩌면 정신적인 산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