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의 집과 비밀의 방에는 여성이 있었다

여성 고딕 작가 작품선 <공포, 집, 여성>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이렇듯 고딕 소설은 다양한 층위의 여성들을 보여주고 그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직시한다.

-옮긴이의 말(장용준)




엘리자베스 개스켈, 버넌 리, 루이자 메이 올컷, 메리 셸리를 찍먹할 수 있는 중편 앤솔로지다. 고딕을 향한 여러 갈래의 입구 중에서 특히 <블라이 저택의 유령>은 강렬했다. 헨리 제임스의 원작인 <나사의 회전>을 구입한 것은 물론, 오며가며 눈독들이고 있던 메리 셸리의 대표작 <프랑켄슈타인>과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도 구입했다. 다양한 여성 작가들을 만나볼 수 있는 독서에세이와 자료들을 통해 여성 고딕 작가들도 알게 됐다. 이미 존재를 알고 있었던 <공포, 집, 여성>이야말로 어떤 작가를 먼저 탐욕적으로 읽어볼 지 알려줄 수 있는 교차로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읽어본 후기는 일단 대만족! 예전에는 한 번 마음에 든 작가를 계속 읽었고, 재미와 서스펜스가 끝없이 이어지는 시리즈를 더 선호했었기에 앤솔로지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여전히 장편 중에서도 2000페이지 이상의 묵직한 시리즈를 좋아하지만, 단편이나 연작에도 맛을 들인 상태다. 스릴러 덕후의 자연스러운 입문서인 코넌 도일을 거쳐 에드거 앨런 포의 저세상 호러맛까지 알게 됐다면 단편의 매력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공포, 집, 여성>의 수록작들은 중편이다. 풍성한 스토리와 강력한 여운을 맛볼 수 있다.




고딕, 호러, 스릴러 문학 전문가인 역자가 고심해서 고른 작품이라는 것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이 구역의 대표작가 중 하나인 샬럿 브론테를 비롯하여 이 시대 여성들과 여성 작가들은 서사 내부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에 좌절하고 굴욕을 느꼈을 것이다. 알콩달콩한 신분 초월 로맨스에 대리만족을 해야 했던 찐 조선시대 규수들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런 여성들의 한을 풀어주는 장르가 호러였다. 최근 한국의 귀신이나 무당이 소재가 되는 작품들도 창작 및 리메이크 등으로 재조명을 받고 있다. 넷플릭스 등의 스토리 플랫폼에서는 다양한 호러 판타지가 주목을 받고 있다. 신간은 물론 고전인 <프랑켄슈타인>과 <제인 에어> 역시 리커버를 거듭하는 중이다. 특히 애서가, 번역가들이 지난 세기 여성 작가들을 빈출시킴으로써 위상의 밸런스를 찾아가는 중이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번역과 출판 시스템이 지금과 달랐던 30년 전만 해도 세계문학전집이나 세계위인전집 등에서 여성 작가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번역을 거치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한국 작가도 이제 막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한데다, 외국 작가는 해당 국가나 영어권 국가의 순위와 상관 없이 번역당해서 한국에 수입되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다. 어린이 버전 해리엇 비처 스토(재독은 원서)와 루이자 메이 올컷(원서 구입)을 읽었지만 완역본(일까?)으로 읽어본 19세기 여성 작가는 샬럿 브론테가 전부였다. 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모든 책을 읽지 않았고 있는 책을 읽다보니 한국 (남성) 작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물론 그 와중에 토베 얀손과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읽었지만...이후 민음사판으로 에밀리 브론테를 읽게 된 시점은 '한국문학' 집중기인 고등학교 시절의 공백을 건너 뛴 21세기였다. 그러니까 정작 지금보다도 책을 많이 읽었던 20세기에는 인종과 젠더에 공정한 독서를 못했던 것이다. 출판 시스템 자체가 기울었기 때문에. (계급은 좀 다를 수 있음주의)


그러므로 <공포, 집, 여성>과 같은 기획이 더 많아져야 한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1의 테마도 <여성과 공포>였다. 해당 시리즈에 수록된 5명의 작가 중 3명이 바로 이 책에도 수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 권으로 그 3명을 동시에 만난 후 다시 한 명씩 읽어보려고 앤솔로지를 먼저 구입했다. 결과는 앞서 언급했듯이 대만족!




<나를 찾아줘>와 <위기의 주부들> 등으로 대표되는 도메스틱 스릴러의 원조 격인 작품들이다. 금기를 깬 여성들의 '여행'을 박진감있게 묘사한 엘리자베스 개스켈과 심리적으로 주도하고 지배하는 여성의 매력(호불호 있음주의)을 전달한 버넌 리는 이 책들이 나오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작가들이라 신선했다. 이 책을 통해 '부캐'였지만 정말 좋아서 집필했던 루이자 메이 올컷의 고딕 스릴러에 입문했고 이 사실을 널리 알리는 책임을 맡은 역자는 신경써서 올컷의 양면성이 담긴 작품을 선정했다.


그렇게 알게 된 <비밀의 열쇠>라는 작품에서 로맨스와 스릴러라는 쌍둥이는 제대로 단짠단짠을 선보인다. 역자는 이 작품의 한계를 언급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한번 더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전설적인 존재인 메리 셸리는 한 세대 앞서 존재했고 다른 맛이다. 읽어보면 메리 셸리가 어떻게 이 구역의 가모장이 됐는지 알게된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주관적으로는 원픽이다. 그래서...


개스캘과 버넌 리의 다른 책도 읽어보겠지만 내가 쓰게 될 고딕인 듯 고딕 아닌, 일명 <비밀의 방>과 관련된 서사는 올컷과 셸리를 적절하게 조합한 스타일이 될 것 같다. 그러니 우선 원서를 확보한 <프랑켄슈타인>과 <작은아씨들>을 읽어야겠다.





위험을 공유하고 함께 탈출한 아망트는 이제 격식과 예의를 갖춘 말투 대신 좀 더 자연스러운 말투를 썼다. 그것은 말을 건넨 이가 듣는 사람을 보호하겠다는 의지가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96p, 회색 여인(엘리자베스 개스켈)


남편이건 아내건 늘 더 잘난 상대에게 타박당하고 지적당하는 사람은 바로 눈에 띄게 마련이죠. 그런 부부는 둘 다 자의식이 보입니다. 즉 관찰하고 트집 잡는 버릇과, 관찰당하고 지적당하는 게 습관이 되면 겉으로 드러나죠.

-128p, 오키 오브 오키허스트, 팬텀 러버(버넌 리)


릴리언은 짓궂게도 자신이 그에게 우위를 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은 모르고 자신이 먼저 알게 된 것은 미리 무장한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면 마주쳤을 때 무방비로 놀란 표정을 보일 염려도 없고, 자신은 상대방이 무언가 떳떳하지 못한 게 있다면 그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보며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263p, 비밀의 열쇠(루이자 메이 올컷)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거울을 볼 때마다 비치는 그 얼굴과 몸을 흡족한 마음으로 즐긴다. 더 나아가 집 안에 더 많은 거울을 들였다. 베니스의 그 어떤 미인보다도 더 자주 들여다본다.

-348p, 변신(메리 셸리)




여성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 19세기 유럽 여성의 행동 반경이나 제약을 감안해야 한다. 아주 독특한 환경에서만 글쓰기와 지적 활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어떤 작가는 다른 지역과 다른 계급에 대해서 책으로만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개스켈처럼 다양한 계급의 삶을 서술하려는 시도를 했던 작가들이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알려지기 시작한 작가들의 환경을 알려주는 이야기들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여성 작가 목록 작성을 도와줄 <글쓰는 여성의 공간>과 <예술하는 습관>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