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역의 페르소나는 나야

쿠팡플레이로 갔다는 <가십걸> 오리지널, 회상하기

영화보다는 책이 좋았다. 책이 많은 집에서 태어나 책으로 세상을 넓히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체득했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에 관한 책을 찾아내는 것이 즐거웠다. 분가한 뒤, 내 서재를 마련하기 전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를 더 많이 봤다. 차분하게 책을 읽거나, 책을 사모을 공간이 없었다. 그럼에도 카페와 학교 전산실에서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이미 모든 영화에 접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다른 것 보다도 일찍, 혼자 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영화보기였다. 영화제에서 심야영화를 보고 아침에 돌아오던 추억이, 첫사랑이나 다른 어떤 두근거리던 경험보다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럼에도 시네필이라고 하기엔 데이터가 부족했다.


이름을 붙이려거든 한줄평론가 정도라 하자. 덕후인 듯 덕후 아닌, 덕후 같은 나. 책 쓰고 싶어서 도서대여점까지 들락거렸지만 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것도 좋았고 시나리오를 써보려고 씬별로 끊어서 보기도 했다. 그때 내 교재가 <스캔들>이었다. 제목이 보통명사라 헷갈리니 편의상, 이미숙의 <스캔들>이라 부르겠다. 이미숙 배우에게 반했지만, 원작은 프랑스 영화 <발몽>이다. 같은 시나리오로 만든 장동건의 <위험한 관계>, 리즈 위더스푼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에 비해 <발몽>은 임팩트가 부족했다. 프랑스 영화가 정석은 아닐지라도 프랑스 영화에 시큰둥했기 때문에 영화덕후라는 정체성은 부담스럽다. 영화 좋아한다는 말을 종종 하지만, 진짜 영화광을 만나면 그냥, 몇몇 장르만 좋아한다고 해야 속편하다. 좋아하는 마음을 평가하고 평가당하는 기분은 씁쓸하지. 영화평을 잘 쓰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이건 정말 잘 한다고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이라, 겸손할 생각이 없다.




자매영화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에서 리즈 위더스푼의 역할은 <스캔들>의 전도연과 상응한다. 그런데 내 인생 페르소나는 이미숙이 맡은 그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리즈의 리즈시절이 아니다. 디즈니플러스 최신 공개작 중, 90년대 작품인 <뱀파이어 해결사>의 주인공 사라 미셸 갤러다. 지금은 다 같이 중년이지만 그땐 한참 언니였던 이미숙은 그냥 좋아하기만 하고, 조금 언니였던 사라 미셸 갤러를 롤모델로 삼았다.


<뱀파이어 해결사>는 구하기가 어려웠다. 다른 조금 언니인 김선아와 조금 동생인 문근영의 한국영화를 봤다. 그러다 <섹스 앤 더 시티>로 넘어갔다. 사만다 역의 킴 캐트럴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하려고 했지만, <황진이>의 하지원이 갑자기 시선강탈을 했다. 그 무렵 <가십걸>도 시작했는데....


새로운 인생 페르소나가 <가십걸>에 있었다는 것은 10년 후에 알았다. 그 사이 하지원에서 김지원으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고 그건 다름 아닌, <가십걸> 덕후 김은숙 작가 덕분이다. 하지원의 다른 인생작인 <시크릿 가든>에서 몇 안되는 걸스 토크를 주도하는 김사랑이 <가십걸>의 그 유명한 '이 구역의 미친X'라는 대사를 인용한다. 얼마 후 김은숙 작가는 아예 <가십걸> 세계관을 복붙한 <상속자들>로 글로벌 크리에이터가 된다. 이렇게 들이미는데도 꿋꿋하게 <가십걸>은 찾아보지 않았다. 현실도피성 빈지왓칭이 필요할 때 <상속자들>을 반복해서 봤을 뿐. 나중에 <가십걸>과 비교하며 깨달았지만, <상속자들>의 진주인공은 '상속 못한 자들'이다.




<가십걸>은 험프리 남매의 상류 사회 진출로 시작한다. 참, 원작 소설도 최근에 구매했는데 조금밖에 읽지 못했다. 험프리 남매가 등장하기 직전, 그들의 욕망을 집약한 존재이자 이 구역의 여신인 세레나 반 더 우드슨이라는 뮤즈가 등장한다. 크리스틴 벨이 읽어주는 블로그 가십걸의 기사와 함께. 세레나가 돌아온 상류사회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복도에 나란히 선 세레나, 블레어, 네이트의 삼각관계는 어쩐지 불길하다.


친구의 친구와 첫경험을 한, 블레어와 네이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프롬퀸, 프롬킹이 된다. 공개된지 10년이나 지나서 봤지만, 그럼에도 충격적인 사건사고의 연속이었다. 그러고보니, <스캔들>의 주인공 3인방은 대략 30대 후반 정도였지만 일부는 십대였다.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은 아예 전원이 십대였다. 그래서 사라 미셸 갤러가 더 멋있게 느껴졌다. 그땐 그랬다. 생각해보니 지금은 그렇게 조숙한 아이들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땐 내가 미숙한 점을 뛰어넘은 다른 존재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댄과 제니를 향해 땍땍거리는 블레어를 처음부터 좋아한 건 아니다. 블레어라는 프로토 타입을 만나기 전에도 김은숙 작가의 캐릭터 속의 그녀를 많이 봤었고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온에어>의 오윤아는 김 작가 본인의 페르소나이기도 하지만 <시티홀>의 추상미, <시크릿 가든>의 김사랑, <신사의 품격>의 꼬꼬마 메아리, <상속자들>의 김지원, 그리고 또 누가 있더라. <더 글로리>의 이사라?


<가십걸>에서 가장 좋아하게 된, 최초의 입덕 장면은 블레어와 척의 첫키스였다. 어쩌면 그때 이미 그들의 운명을 감지한 것 같다. 네이트나 제니처럼 착한 아이들은 감당할 수 없는 그들의 욕망을.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봤다. 이제 블레어의 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욕망과 욕구불만과 애정결핍. 다 가진 것 처럼 보이는 세레나(그런데 그건 아니고)한테 치이고 심지어 본인을 능가하는 욕망을 가졌는데 애정 또한 넘치게 받고 있는 제니한테까지 치여서 매번 정신줄을 놓는 블레어. 권력에 집착하고 부와 권력을 가진 남성(알파메일)에게 집착하지만 남성에게 의존하는 건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스스로 알파피메일이어야 하는) 블레어. 척과 밀당을 하면서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즉 <발몽>의 그녀를 패러디하는 것은 덤이다. 하지만 블레어의 롤모델은 의외로 오드리 햅번. 나름 순정도 있는 여자다.




뉴욕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계단, 센트럴파크 베데스다 테라스의 계단은 블레어의 구역이다. 블로그와 스마트폰 사이, 라는 절묘한 세대 교체기에 인증샷 문화까지 더해, 가장 유명한 뉴욕 드라마가 된 <가십걸> 스팟은 여행자들의 필수 관광코스다. <가십걸> 마지막 시즌에서 이미 삼성 갤럭시 폰을 쓰지만 여전히 가십걸이라는 익명의 블로거한테 매일 뒤통수를 맞느라 바빠서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을 할 시간이 없는 이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래서 가십걸이 누구냐고?


극중 작가 댄 험프리의 소설 <인사이더> 연극판에서 가십걸의 나레이션을 '보이는 라디오' 버전으로 들려주는 크리스틴 벨이 깜찍하게 등장한다. 잠깐 가십걸 블로그를 해킹했지만 진짜 가십걸로는 전혀 거론되지 않아서 서운해하는 조지나 스파크스 역의 미셸 트라첸버그는 6세에 데뷔해 다른 배우들보다 좀더 경력이 있는 베테랑이다. <아이스 프린세스>에서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과학천재 역할로 단독 주연을 맡았는데, 심지어 그녀의 코치로 등장하는 실패한 피겨 선수이자 친구 엄마 겸 엄마 친구는 킴 캐트럴이다. 트라첸버그는 <뱀파이어 해결사>의 7번째 주연이기도 하다. 사라 미셸 갤러의 친척 동생(?)으로 시즌 4 정도에 합류한 것 같다.




사라 미셸 갤러의 극중 베프, 앨리슨 해니건은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의 릴리. 후속작인 <내가 그를 만났을 때>는 <가십걸>에 깜찍하게 출연했던 힐러리 더프가 미래의 킴 캐트럴이 되어, 현재를 회상하는 설정이다. 주인공인 힐러리 더프와 운명적 만남을 하게 된 남친인듯 남친 아닌 그 친구의 구여친이 바로, <가십걸>의 블레어 월도프였던 레이튼 미스터다. 힐러리 더프의 문제적 엄마는 <크리미널 마인드>의 에밀리 프렌티스인 패짓 브루스터다. <내가 그를...>의 최신 시즌(디즈니)을 보면서, 한번씩 루즈해질 땐 <리버데일>이나 <블랙리스트>의 최신 에피소드(넷플릭스)를 보고 있는데 이번달 안에 <뱀파이어>도 시작할 예정. 그러고보니 <크리미널 마인드>도 새로운 시즌(디즈니)을 하고 있었지.


<가십걸>은 종료를 한다 한다 하면서 안 하더니 어느 틈에 사라지고, 쿠팡플레이에 가 있다고 한다. 뉴욕 복수 드라마 <리벤지>에서 에밀리/아만다의 아역을 맡았던 에밀리 앨린 린드가 나오는 신작 <가십걸> 리부트는 웨이브에서 방영중. <핸드메이즈 테일>이 종영하면 웨이브에 잠깐 들러볼 참이었는데, 그때 <가십걸> 리부트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