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으로 안구 정화를 했지만, 씻기는 싫어

싫어증 극복을 위한 산책에세이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역세권이라는 작은 행복


예쁨 속에 편리함이 보장된 풍경을 사랑한다. 도시의 효율과 접근성, 촘촘한 지하철 네트워크를 사랑한다. 지하철이 항상 즐겁기만 한 곳은 아니지만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설레긴 한다. 전철역에 걸어서 갈 수 있는 날들이 행복했다. 그 행복은 (항상 그랬던 건 아니지만)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어떤 풍경은 별다른 편리함이 없어도 예쁘다. 잘 조성된 공간이 마음 속까지 정리해주는 것 같다. 깔끔하게 정돈된 책표지를 바라보는 것 같다. 황금비율과 적절한 분할과 안정된 배색과 단정한 폰트를 사랑한다. 예쁨을 호소하는 트렌디한 디자인 말고, 그저 홀로 완전한 디자인을 사랑한다. 유행을 타지 않는 크롭 자켓과 심플한 드레스를 사랑한다. 멈춰서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걷기 불편한 곳, 시선이 너무 많거나 너무 없는 곳,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 너무 많거나 너무 없는데 완전히 없을 보장이 없는 곳은 불안하다. 팔다리가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곳이 많으면 좋지만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되고 싶지는 않다. 지인이 아니더라도 지구에 살고 있다는 느낌은 충분히 떠안고 살아가고 싶다. 센스있는 과일가게 사장님과 기억을 잘 해주시는 편의점 사장님의 안부를 자주,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싫은 것도 그냥 해야 어른이겠지?


만사를 잠시 잊고 뛰쳐나가기를, 그것도 이틀 간격으로 충분히 먼 곳에 다녀올 결심을 해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동안 많이 참았다. 참다보니 괜찮았고, 괜찮으니까 귀찮았다. 언제부터인가 피부가 현재의 평균 상태를 유지할 수 없도록 방치했다.


평균 이상의 상태를 유지해봐야 얼굴을 꺼내놓고 다닐 수 없었고 얼굴을 꺼내놓고 다니는 사진을 올릴 수 없었다. 이제와서 다시 부지런해지는 건 고역이다. 무엇보다 얼굴 말고 다른 씻을 것이 많아졌다. 두더지처럼 땅굴에 얼굴을 파묻어도 땅굴 자체는 질서정연하게 관리하고 싶다? 반짝반짝 티끌없는 바닥을 만들어봐야 얼마 못가니 청소는 대충 하고 실내화를 새로 샀다. 그럼에도 설거지는 해야 했다. 세상에서 제일 하고 싶지 않은 티도 안나는 작업이지만 먹으려면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다.


옷이 새로 생겨서 좋다고 빨래를 하면서 그릇이 새로 생기는데 설거지는 왜 하기 싫은걸까? 예전에는 손에 맞는 고무장갑이 없어서 그랬다치고, 지금은 장갑도 있고 주방이라고 할만한 곳도 있는데 왜 하기 싫은걸까? 여전히 하기 싫은 날이 많지만 팩트는 지난 3개월 동안 평생 했을 법한 설거지를 한 느낌이다. 못해도 일주일에 네다섯번은 했을 것이다.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중요하다. 한번에 몰아서 하려는 습관때문에 가뜩이나 싫은 일을 더 미루게 되니까, 모든 그릇은 반만 꺼낸다. 그보다도 그릇을 말릴 공간이 부족하다. 반 이상 꺼낼 수가 없다. 더러워진 그릇이 서재까지 넘어오게 할 것이 아니라면.



밀린 일이 없다는 상쾌함


아침에 밥을 먹으려고 며칠 미루어 둔 설거지를 했더니 방전된 상태로 연장전을 하고 있다. 세수하고 자야하는데 아마도 물티슈로 발만 닦을 것 같다. 전동칫솔을 구입하고 3주 정도는 칫솔질이 재미있었는데 딱 거기까지다. 씻고 자면 당연히 더 상쾌하겠지만 피곤하다.


타이핑을 할 기력은 있는데 손씻고 클렌징티슈를 예쁘게 접어서 얼굴을 닦아낼 기력은 없다. 혹시 모르지. 내가 쓴 마지막 한 문장에 갑자기 힘이 나서 얼굴도 닦고 발도 닦을지. 가끔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들어서 소름이 돋을 때도 있었다. 지나고 나서 다시 읽으면 유치한데 그 기억때문에 지우지도 고치지도 못하고 흐름만 조금씩 바꿀 뿐이다. 연속되는 글을 쓰려고 할때 가장 고민했던 것도 그런 것이다. 다음 챕터를 쓸때마다 이전 챕터를 고치고 싶어지고 이 증상이 누적될까봐. 연재물을 약간은 억지로 쓰다시피 했더니 그 증상을 적당히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힘이 넘치면 퇴고를 열정적으로 하되, 새 글을 쓸 기력을 남겨둔다. 힘이 부족하면 새 글만 쓰거나 다소 무기력하게 퇴고를 하면서 기력을 보충한다.


글쓰다 힘이 빠질때도 있고, 너무 열심히 오래 몰입해서 쓰면 탈진하거나 뒹굴겠다는 강한 욕구를 느끼기도 한다. 대체로 어디쯤에서 맺어야할지 알고 있을때, 그 분량에 맞는 호흡으로 살살 쓰다가 쓰는 맛에 힘이 날 때가 많다. 그럴때는 다 쓰고 나서, 하기 싫던 설거지나 클렌징을 하기도 하고 내일 할 퇴고를 미리 당겨서 하기도 한다.


그래봐야 스케줄이 당겨지는 건 정말 한순간이다. 내일 아침에 할 퇴고를 1시간 정도 미리 해봐야 내일 1시간 늦게 일어나면 원점이니까.




결국 얼굴도 발도 안 닦고 이틀이나 지나서 한번에 샤워를 했다고 한다. 그동안 설거지는 두 번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