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생각을 하려다, 딴생각을 했다

기분전환(distraction)과 권태(tedium)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기억을 끌어올려 숨은 욕망을 찾고 있다. 글쓰기나 사업에 활용할 목적이 아니어도 내면에서 부유해 보는 자아성찰은 유익하다. 지금 쥐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고 싶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자아성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자아성찰은 나의 명랑한, 자아성찰 시간을 위해 남겨두고 자아성찰 뽐뿌의 핵심인 산책으로 돌아오자.


산책이 자아성찰을 유도하는
과정은 단순하다.


익숙한 곳을 걷다 보면, 딴생각을 하는데 특히 요즘처럼 어디 앉자마자 폰을 깨워서 방광이 터질 때까지 온갖 미디어의 지표를 확인하는 날에는 잠깐이라도 딴생각을 해야 한다. 산책의 전단계일 경우가 많은 샤워나 화장을 하면서도 딴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행위에는 목적지가 있어야 한다.


약속이나 산책계획이 없다면 밥만 먹는다. 그마저도 귀찮으면 피자를 시킨다. 쌀통을 가득 채웠지만 장보기부터 밥상 차리기가 너무너무너무 귀찮은 날들이었다. 싫어증 전 단계가 왔다. 이어서 싫어증이 오면, 더욱 공들여야 하는 일을 하기 싫어서 장을 보고 밥을 한다. 그 시간에 글을 쓰거나 퇴고를 하고 싶은 상태에서 차라리 밥을 해 먹겠다는 상태로 전환하는 포인트를 찾은 것 같다. 이 또한 자아성찰과 루틴을 탐구하는 에세이 쓰기의 매력이다.




한결같이 자기 돌봄에 충실하려는 마음을 항상 이겨먹는 건, 한 번이라도 덜 움직이고 배를 채우는 것이다. 결국 피자를 시켰고, 오랜만에 한국식(?) 페퍼로니 피자에 오븐 스파게티를 추가했다. 처음엔 충동구매였는데, 그것마저 이제는 습관이 돼버렸다. 다른 배달음식조차 귀찮아서 피자를 시키는 주제에 스파게티 욕구를 못 참고 2.5인분을 시켰다. 아, 포크가 없네? 결국 설거지를 한다. 오늘은 설거지 얘기를 안 하려고 했는데, 망했다.


허기를 참다 참다 피자를 시켰고, 피자와 새로 주문한 키보드가 나란히(?) 도착해서 언박싱 딜레마에 빠졌다. 총체적 난국이다. 키보드가 제대로 왔는지 확인하고 싶은데, 피자박스를 만지는 순간 내가 기름덩어리로 변신한 느낌이다. 키보드 상자를 열기가 두려웠다. 제품박스 위에 덧씌운 택배박스만 제거하고 새 키보드를 반찬 삼아 스파게티를 먹었다. 피자는 또 식어있었다. 저녁으로 두 조각을 먹고 2/3판이 남아있던 피자는 다음 날의 아침과 점심을 해결해 주었다. 다른 메뉴를 고민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냉동하지 않고 박스채로 놔두었다. 배고프고 어지러우면 냉큼 두 조각을 팬에 데웠다.


피자 세끼, 처음은 아니다. 뭐, 괜히 피자덕후가 아니다. 그런데 키보드 반찬은 처음이었다. 정작 박스를 열어보니 비닐 포장도 되어있었다. 전에 쓰던 키보드보다 더 오래 사용할지는 모르겠지만 유명한 값은 하는 걸로 보인다. 안정적인 디자인과 컬러, 그리고 사용감. 블루투스 연결도 쾌속이다. 일단 합격. 언박싱을 한 직후에는 키보드를 사용할 일이 없어서 일단 인테리어 소품이 됐다?


잠깐 밤잠을 잤는데...아주 잠깐은 아니고 원래 미라클 모닝을 하는 사람들이 자고 일어나는 시간에 자고 일어났는데 내게는 불안하고 불편한 수면패턴이라 일어날 때마다 어리둥절했다.


금요일의 미라클 모닝이라니.
또 망한 건가?


수요일부터 3일째 새벽기상을 했지만, 그날 아주 일찍 잤기 때문에 목요일 새벽에는 기운차게 글을 쓸 수 있었다. 이게 지난주 금요일의 상황이다. 그리고 또, 일주일 동안 미라클 모닝을 했다.


그전에는 낮잠을 너무 늦게까지 자거나, 밤잠을 자려고 버티다 초저녁에 기절해서 미드나잇에 일어나는 날들이었고 그때보다는 지금이 낫다. 낮잠을 안 자려고 몇 날 며칠 동안 산책을 계획했는데 계속 실패하다가 현충일에 방탈출을 했다. 그날 최대한 버티다 기절했더니 이제 미라클 모닝이 되었다. 미라클 미드나잇보다 낫다고 위로를 할 수밖에.




산책으로 시작했지만 결국 일중독 모드로 하루를 보낸 그날, 퇴근을 기념하는 쇼핑을 핑계로 또 산책을 했다. 최근에 산 책이 많아서 더 이상의 책쇼핑은 즐겁지 않았(는데 새로운 공간-즉, 너무 우려먹은 공간의 문제였다-에서는 더 즐거웠)고, 다른 쇼핑은 기능적 장보기라 싫었다. 저 멀리 귀소 방향의 노을이 따뜻한 핑크빛이라 달리다시피 걸었다. 노을과 구름의 적절한 비율을 감상하며 귀가하는 행복을 누렸다. 익숙한 길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익숙하지 않은 곳을 산책하면 더 좋다. 의식의 흐름 자체가 달라진다. 익숙하지 않은 곳은 보도블록의 질감부터 다르고 어디서 길을 건너야 할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므로 뇌세포를 많이 사용한다. 가깝지만 경로를 확실하게 알 수 없는 곳을 찾아간다면 지도를 여러 번 확인한다. 그때마다 멈추어 서서 또 의식의 흐름을 바꾼다. 익숙한 공간에서 흐름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효율적인 작업과 휴식을 위해 모든 동선과 순서를 루틴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혹은 충동적으로 바꾸기도 하지만 딴생각을 하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상황종료가 돼있다. 이게 좀 심한 편. 그래서 계속 새로운 동작과 새로운 산책코스를 추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