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각, 모든 글이 여행계획으로 끝남주의
언제부터 계획덕후였는지, 그 시작은 어렴풋하지만 대략 나의 빅 픽쳐(?)는 1997년, 사회숙제로 제출한 리포트 <유럽일주계획>에서 시작된 것 같다. 정확한 연도는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98년 이후는 아니었고, 96년 이전은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에 헷갈려도 97년이라고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다.
그때 나는 어린이용 헤세와 어른용 헤세, 있는 책 없는 책 가리지 않고 섭취했던 왕성한 인풋 욕구와 밤마다 노래 가사를 쓰고 (아이돌 싱어송라이터 지망생이면서도 나름 과학고 수험생) 친구들에게 서너통씩 편지를 쓰던 아웃풋 욕구를 겸비했다. 아, 물론 그 시절의 믹스테이프도 빼놓을 수 없겠지. 하지만 그건 아주 사적인 프로젝트였고, 나의 경우 (아이돌 지망생이었으니까 데모테이프가 우선이었으며) 사랑고백용 테이프는 (그게 뭔지 모르지만) 없었다.
사회시간에 발표수업을 하면서 '백야현상'을 설명하다 한자 白夜와 기울어진 자전축이 내 머릿속에서 실시간으로 융합하는 놀라운 경험도 했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내 설명에 감탄(!)하셨던 것 외에는 예쁘셨다, 정도만 기억이 난다. 떠올려보니 그땐 쌤이 젊으셨다, 라는 것도 상당히 중요했던 시기였고 (주변에 큰언니뻘 젊은 어른이 없는 장손이었고) 고위도 지방에서 나타나는 '백야현상'이 96년인지 97년인지 아직도 조금은 헷갈리지만 그 쌤이 <유럽여행> 숙제를 내주셨고 프랑스에서 봉골레 스파게티를 드셨다고 했으니(이탈리아가 아니었군?!) 97년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해본다. 아무리 조숙했다고는 하지만 이 모든 일을 내가 만 13세에 (97년이라고 해봐야 만 14세지만) 경험했을 리는 없으니.
<유럽여행> 또는 <유럽일주계획> 프로젝트도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정도였냐면, 그것은 내가 12년 또는 17년의 학창생활을 통틀어 가장 많이 회고하는 숙제였다. 순위를 매기자면 그 다음은 <데이빗 핀처> 또는 내맘대로 덕질한 한국의 젊은 <여배우들> 리포트(2005년)일 것이다. (데이빗 핀처를 제출한 '영화론'은 언론정보학 전공수업이지만 내 전공은 아님주의) 그러니까 자칭 리포트의 여신(?)이었던 2005-2006년에 작성한 가장 성공적인 숙제보다도 깊은 곳에 각인된 중2병 소녀의 여행계획이 왜 중요하냐면, 나는 그 여행계획을 통해 세상을 발견했다.
'계획'의 수학적 중요성을 발견했고 이후의 공부계획을 날짜, 시간 단위로 작성하게 되었다. '계획'의 힘을 알기에 5학년 영재수학 프로그램으로 <유럽여행>이라는 테마를 추진한 적도 있다. (지도에서 가장 합리적인 동선을 도출하고 각 도시간의 최단거리 를 km로 확보해서 합산하기: 학생이 여러명이면 각자의 동선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비교할 수 있다.)
한편 계획덕후가 된 이후로 가지게 된 결정적인 치트키는 바로, 벼락치기 시스템이다. 물론 벼락치기를 하면 안되는 과목을 벼락치기해서, 또는 계획적으로 벼락치기하지 않아서 망한 학기도 많다. 이번 학기에 괜찮은 오디션이나 공연이 없다면 (말 그대로 혹은 비유적으로; literally or figuratively) 대체로 벼락치기 시스템의 성공율은 높아진다.
그 계획은 계획덕후가 중2때부터 개발한 최적의 시스템이니까. <인간관계론> 이후 자기계발서는 협찬 도서만 통독하고 있지만, 중학생 시절에 다른 모든 책과 함께 자기계발서도 왕성하게 탐독했다. 그 중 한 권이 <시간관리와 공부방법>이다.
그래서 벼락치기 어떻게 하냐면, 이전 3개월 동안 나름 꾸준히 수업을 듣거나 진도를 나갔다는 전제하에 첫 시험 날짜를 기준으로 2주 전부터 복습 일정을 배치한다. 여기서 분량이 중요하다. 복습 2주의 전반부에 [시험범위를 정독 + 가능한 세부사항까지 필기(1)]하고 후반부에는 [필기(1)을 정독 + 아는 내용을 빼고 나머지만 다시 필기(2)]하는 과정을 가능한 여러번(현실적으로 2-3번) 반복한다.
별거 아닌 거 같다. 중2때부터 이짓을 10년 동안 하다보면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가 무슨 뜻인지 알게 된다. 다만 인스타그램 세대가 N회독과 단권화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능률이 오르지 않는 이유는 이미 그 방법을 모두가 알고있고, 그래서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의외로 적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타인의 계획을 모방하기 때문일지도.
세상은 스스로 계획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자녀가 공부를 못할수록(!) 학부모의 대리 계획이 심해지는데 이는 자녀가 공부를 더 못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대체로 자녀의 무계획이 답답한 학부모의 특징은 '콩심콩'이다. 본인이 무계획적 십대를 보냈기에 자녀를 통해 다시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현명한 부모는 책을 쥐어주지 않고 자신이 책을 든다.
지도상의 최단거리를 활용해 배를 타지 않고 '자유의 여신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공원을 알아냈다. 광역버스 한번에 도착 가능한 뉴저지 유니언시티에 체크인을 한 뒤 우버를 타고 리버티 스테이트 파크로 이동했다.
이곳이 <신비한 동물사전>에 등장한 출입국 관리 사무소(Immigration Office)였을 듯 하다. 리버티 스테이트 파크 앞에 있는 앨리스섬에 이민박물관이 있다. 배를 타고 유럽에서 뉴욕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의 정취는 덤이었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황현산 역),
<파리의 우울>, 68p, 24.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