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덕후 휴대폰 중독자의 여름산책

배터리 대신 보들레르를 챙기세요!

책이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책과 함께한 덕분에 빛났던 산책을 무려 두 번이나 하게 된 주였다. 늘 지나가기만 했던 블루스퀘어에 <시카고>를 예약해둔 날에는 공연 두 시간 전에 자리를 잡고 드디어 원조 산책덕후 보들레르님을 만났는데...


예상을 전혀 못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전 정보가 충분하지도 않았기에 무슨무슨 제3외국어로 된 등장인물이 나오는 판소리는 놀랍게도, 재미있었다. 언젠가, 중복템을 허락하는 날이 온다면, 눈에 밟히는 드가를 입은 보들레르도, 읽어봐야지.


오늘은 책도 걷기도 주인공이 아니었지만 해장 요가 2부를 위해 잠깐 보들레르를 베고 누웠다. 그쯤에 이미 보조배터리가 방전됐고, 기본배터리가 바닥을 향해 돌진하는 휴대폰으로 최소한의 활동을 하면서 전철 속 멍한 시간에 책을 펼쳤다. 오늘 저녁 제 정신으로 혼산책을, 혹시나, 하게 된다면, 막간의 웃음을 위해 읽으려고 가져온, 같은 책이다.


아니, 파리가 우울하다며.


이 책은, 드가를 입을 수 밖에 없는 제목을 가지고, 이방인을 질리게 하는 파리나 시골언니 엠마 보바리가 동경하는 파리보다는 그냥, 약간 마콘도 같은 파리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내가 더위를 먹었나. 지하철에서, 빙그레 웃다가, 웃는 내가 웃겨서, 낄낄거릴 뻔. 아, 여긴 지하철이지. 경전철에는 기관사가 없지만.... 승객은 많다. 열차가 작거나 말거나 승객은 항상 넘치게 몰려오고 휴대폰을 읽던지 책을 읽던지 떠밀려 내리게 될까봐 정차할때마다 눈을 부릅뜨게 된다. 여전히 내려야할 역이 오기 전까지 몇 개의 역이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처음으로 바로 직전의 역 이름을 확신(?)했다. 물론 다음 역은 이미 알고 있다. 한 개의 역을 이동하기 위해 열차를 타지 않고 걷다보니, 이 역과 다음 역은 세트가 되었다.


봄에는 내 역보다 다음 역에서 더 많이(?) 놀았는데, 여름에는 이 역이나 저 역이나 나가는 게 고문이다. 찜질방도 가고 싶지만 가는 길이 찜질방이다. 버스를 타면 직선 거리의 거의 두 배를 돌아 갔다가 내려서 길을 건너던지, 직선 거리의 60% 정도만 가서 내려서 남은 거리를 걸어야 하니까, 그냥 걷는다. 봄, 가을에는. 아직 가을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가을에도 봄과 같이 정규 산책코스가 되겠지.


여름에는.... 코엑스 안에서 산책을 하면 좋겠지만, 집에서 코엑스 가는 길이 찜질방이라 어지간해서는 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의 파리는 여행계획 27년 차에 겨우 동서남북이 생겨났는데, 그마저도 엉성하기 짝이 없다. 파리언니 파리오빠들이 파리의 언어로 모라모라하는데 국보급 부동산이 아니면 위치는 커녕 그게 먹는 건지 장소인지도 헷갈린다. 그럼에도 파리가 처음인 나의 프린세스는 거침없이 돌아다닌다. 이제 곧 그녀는 소녀 탐정이 될 예정이지만, 어떤 능력을 가지게 될 지는 나도 모른다. 스릴러(?)와 괴담을 줄줄이 읽고 어리둥절한 파리 책도 좀더 읽고 정 안되면 엠마 보바리라도 다시 불러내야지.




봄에 다시 갔어야 할 산책로와 가려고 점찍어 둔 독립책방과 한 개 남은 인센스를 보충해 줄 대형책방과 글쓰기 좋은 아지트도 한동안 계획하지 못할 것 같다. 싸돌아다닐 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청소를....아니, 어차피 내일도 어딘가 가긴 가야하는데 갔다와서 씻고 누워있는 모습이 눈에 훤하다. 정작 집에 오면 생각보다 시원해서 씻기 싫어증에 빠져들 수도 있다. 오늘도 그 많은 땀을 (더워서 흘린 건 아니고 술 깨느라) 흘렸는데, 귀갓길에는 휴대폰을 충전하겠다는 의지만 휘날렸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잘 꺼지던 폰이 오늘따라 1%만 남은 상태로 30분 이상 살아있어서 더 초조했다. 집에 올때까지 폰을 쓸 일도 없고, 손목시계도 있는데 왜? 차라리 폰이 꺼졌다면 그냥 없는 셈 치고 밤공기를 즐겼을텐데, 1% 남은 에너지바가 애처롭게 반짝이니 괜히 체념하지 않은(못한?) 상태로 마음을 재촉했다. 그렇다고 바로 집에 온 것도 아니었지만, 딴짓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재촉했다.


겨우 3일 뿐인 인스타 방학을 하고 나서 횟수는 몰라도 접속 시간은 확 줄었는데! 폰 자체가 간당간당한 상황은 또 다른 시련이었다. 계절 불문하고 추우면 잠들고 자체발열이 핫팩급인 만 8세가 다가오는 폰은 이제 영원한 휴식을 준비해야겠다. 종합적으로는 장비 교체 및 업그레이드를 해야하지만, 그런 한편 의존도를 더 줄일 필요는 있겠다. 어차피 쓸 수 없는 상태라 내려놓고 책을 봤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배터리를 생각하고 있는 건 좀.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