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가 된 여름아이, 의 여름산책

찜질방이라고 흉보던 그 길을 걸었다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여름은 매년 새로운 버전으로 돌아온다.


아열대 지방의 늦여름을 사랑할만큼, 나는 여름아이였다. 입하에 태어나, 입하가 오기도 전에 여름옷을 꺼내고, 삼복더위의 땡볕에서도 잘 뛰어노는 여름 그 자체. 하지만 서른과 함께 입하는 더이상 여름이 아니었고 그 후로 여름에 대한 사랑이 애증으로 변해갔다. 더워지길 바라던 순간까지 춥다가, 갑자기 말도 못하게 더워지는 이상한 여름. 내게 허락된 자원을 낭비하지는 않았지만 한 사람이 평생 배울 잡기술을 전반부에 때려넣었으니 남 탓은 못하겠다. 나 역시 지구를 덥힌 사람 중 하나니까.


갑자기 각성했다. 갑자기, 왜 그동안 좀비처럼 또는 중학생처럼 하고 다녔는지 의문이 들었다. 가는 곳이 항상 똑같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서점, 서점, 다이소, 올리브영 또는 스타벅스. 방문 순서는 마감시간이다. 교보는 9시 반, 알라딘과 다이소는 10시, 올리브영은 11시에 마감한다. 오늘은 더위를 먹고 쓰러지기 직전에 올리브영에서 잠시 열기를 식히고 교보에서 생필품인 툴러 플래그를 샀다. 롱 플래그에 익숙해져서 롱 플래그가 떨어지면 책읽기 싫어증.




어제는 <오펜하이머> 급발동이 걸려서 뮤지컬이나 미술 전시를 관람할 때보다 더 신경써서 스타일링을 하고 나갔는데 사진을 거의 못찍었다. 영화 시간과 점심 시간이 충돌해서 극장 매점에 있는 빵과 주전부리를 사서 상영관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고 짐이 많으니까 금방 지쳐서 극장 로고와 (화장실 창문으로 보이는) 시티뷰만 촬영했다. 상영관 입장 후 스크린을 배경으로 티켓을 촬영했고 늘 그렇듯이 촬영본을 확인하다가 자연스럽게 각종 댓글과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또 오프닝을 놓칠 뻔.


관람 후 에세이를 쓰려고 카페에 갔는데 무선키보드를 꺼내놓기만 하고 스위치를 켜지 않은 채 휴대폰 화면으로 채팅을 했다. 껍데기는 미국 시절(?)처럼 치장하고 있었지만 이미 좀비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좀비 상태에서 약간의 아무말을 더하면 오히려 솔직한 결과물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이 또한 약간의 아무말이다.) 어차피 말이나 글이나 힘 빡주고 어렵게 해봐야 본인만 손해다.


영어 과외하다 졸면서 영어로 잠꼬대를 하듯이(진짜 해봄주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언어에 진심이 담길 수도 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어제도 오늘도 잠이 부족해서(미라클 미드나잇을 하고 하루종일 밖에 나와있는 거 실화다.) 긴 글은 또 다음주로 미루어 두었다. 계획을 미루기도 했지만 태스크 자체가 정신력이 미치는 범위 밖으로 밀려나있는 것이다.



서점에 가면 확인하려던 것이 있었는데,


금방 피곤해져서 산림욕 하듯이 책등을 쐬다가 인덱스만 계산하고 화장실에 갔다. 아니 뭐 이런거까지 쓰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타이밍에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거대한 거울 셀카를 드디어 찍을 수 있었다! 나름 오늘도 나만의 컨셉...은 아니고, 왠지 더울 것 같아서 마이애미 시리즈를 입고 레이스 도포(철릭 위에 입는 진짜 도포)를 걸쳤다가 조금 큰 길로 나오자마자 벗었다. 하지만 지금 이 곳은 마이애미보다 더운 것 같다. 어제 더위를 먹었나?


드디어 해가 지고 나는 나름 사생활이 보장되는 아지트 역할을 하는 나름 단골 카페에서 다시 도포를 입었다. 쉽지 않은 하루였지만 작심 1일을 깨고 이틀 연속으로 일광욕을 곁들인 여름 산책을 한 것으로 만족하자. 내일은 일몰 무렵에 나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