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진짜 산책덕후를 만나다

왜 다리를 다치면 더 걷고 싶을까?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여행하듯 일상의 순간을 기록하려고 산책에세이라는 계획을 장전해둔 지난 5월, 각잡고 쓴 첫번째 글은 씻기 싫어서 썼다. 제목도 '산책으로 안구 정화를 했지만, 씻기는 싫어'라고 지었다. 지금도 산책 후에 씻는 습관은 전혀 형성될 기미가 안 보이지만, 그날은 남은 에너지를 끌어모아 뭐라도 하고 싶었다. 가장 건강한 선택지는 씻는 행위였으나 그날따라 씻는 행위만큼은 너무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글을 썼다. 그리고 '산책덕후 한국언니'라는 브랜드(?)를 유지했다.




정말로 정말로 산책에 중독(?)된 것은 이 주 전이었다. '산책덕후 한국언니'라는 필명(브런치 only)을 등록한지 약 11개월 만에 처음으로, 일상적인 먹고 눕고 자는 욕구나 읽고 쓰는 욕구를 초월한 산책욕구를 느꼈다. 팬데믹 이후로 처음 주간 산책한도를 초과했던 6월 중순(예술의 전당 + 서울국제도서전)보다도 산책욕구가 타올랐다.


꼭 써야하는 기간제 쿠폰이 아닌 내돈내산으로 영화를 보고 (마침 여름특가를 적용받아 간식비를 더 많이 지출했다.) 다음 날은 인덱스(독서용 플래그)를 사러 서점에 갔다. 하루 쉬고 다시 일하고, 염색약을 사러 드럭스토어에 갔다. 다음 날은 북토크, 그날 밤에서 이어진 날의 아침에는 돈 꿈을 꾸고 로또를 사러 로또명당에 갔다. (무의식은 평소에 관심 없던 이런 장소들을 꽤 '정확하게' 기억한다.) 비오는 날, 귀찮다는 생각이 들면 로또를 못 살것 같아서 세수도 안하고 그냥 나갔다가 미끄러져서 무릎이 까졌다. 남은 라이언 밴드를 긁어모아서 다음 날 강연을 다녀올때까지 버티고 또 하루 쉬고 일했다.


메디폼을 사러 집근처 약국에 갔는데 돌아왔을 때 내 손에 들려있던 건 방수밴드였다. 바빠서 그냥 그걸 썼다. 다음 날 꼭 메디폼을 사겠다며 산책 루트를 짜다가 피아노 연습실을 예약했고, 동선이 틀어져서 방수밴드로 하루를 더 버텼다. 그리고 드디어 방수밴드, 아니 메디폼을 사러 드럭스토어에 갔다. 이제 다 끝났구나! 기념으로 중고서점에 갔는데 상태 좋은 관심책이 많아서 쇼핑백을 가득 채웠다. 남은 예치금은 아직 나오지 않은 다른 책에 펀딩하는데 보탰다. 글로소득은 어차피 책 구매비용에 먹힐 운명이었다. 그렇게 책방 플래티넘 회원권은 연장됐다.




드디어 메디폼을 붙였는데도 계속 열이 나서 하루에 한 번씩 그냥 갈아준다. 이틀이 지나도 크게 호전되지는 않는 것 같다. 마침 비가 오고 다른 이유와 함께 몸이 가라앉아서 이틀째 산책을 쉬고 있다. 무릎이 괜찮아졌다는 확신이 들때까지는 목적없는 산책은 참아야겠다. 어찌나 청개구리인지, 그동안 그렇게 눕는 걸 좋아했으면서 좀 누워있어야 할때는 별로 눕고 싶지가 않고 자꾸 걷고 싶다.


전에는 비가 오고 엉덩이가 무거워지면 나가지 않을 핑계가 생겨서 내심 안도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안도하는 건 무릎 뿐이다. 엉덩이는 무거움을 품고 나가고 싶어하지만 무릎을 두고 나갈 수 없기에 그냥 앉아있는다. 참, 벌집방석을 구입한 이후로 눕고 싶거나 누워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 현상이 현저하게 줄었다. 지금 누워있거나 눕고 싶은 책상덕후들은 꼭 벌집방석을 구매하기 바란다.




말복이 물러가자마자 여행욕구가 화산처럼 폭발하고 있다. 당장 여행을 떠날 상황이 여러가지로 아니라서 적어도 추석 전까지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산책하고 열심히 읽고 써야한다. 아마 추석 연휴에도 스벅과 탐탐을 전전하며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재작년 추석 연휴에는 스터디카페에 또아리를 틀었고, 이번 설 연휴에는 1일 1스벅을 했다. 안 봐도 뻔하다. 명절캠프를 예전에는 댄스클럽이나 피아노연습실에서 했는데 그보다는 카페가 쾌적하다. 시간이 어찌나 잘 가는 곳인지.


가을에 제주도를 가고 싶은데 참고 내년 가을에 세계일주를 갈까? 내년 봄에는 멀리 못 갈 것 같고. 올 가을에 어디라도 가긴 갈 것이다. 예를 들면, 전철이 닿는 가장 먼 곳에. 비행기 여행이라고 엄청 신중하게 결정하지는 않지만 그 전에 해야할 사소한 일들이 있어서 어디를 먼저 가게될 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로또는 아직 안 됐다. 로또가 됐었다면 지금쯤 못가도 인천공항에는 갔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