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가 그리운 가을에 다시 만난 우이천
짧은 여행을 계획 중이다. 이틀째 날씨요정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결국 9월을 못 넘기고 자리를 비우기로 했다. 애초에 지켜야 할 의무가 없는 홈프로텍터 자리였다.
샤워를 하다 갑자기 생각났다.
지금 사는 집은 공과금 고지서를 오프라인으로 받고 있는데 3개월 이상 집을 비우려면 온라인으로 바꾸어야 할까? 주인집에 부탁하는 게 나을까? 별로 급한 일도 아니고 닥치면 어떻게든 해결되는 종류의 일들이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 한번 자리를 잡으면 무럭무럭 영토확장을 해버린다. 이어진 생각은 빈 집에 책을 두고 가도 될까? 였다. 다른 귀중품은 없다. 좋은 옷이나 보석이 있다면 가져갈 텐데 가져갈 만큼 애용하는 좋은 옷이나 보석이 없다.
장기여행을 위한 짐을 꾸릴 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러니까 디스토피아적으로 전혀 다른 세계를 여행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로맨스적으로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생각보다 오래 머물 수도 있는 상황을 예상해 본다. 실제 상황에서 나는 지극히 다큐멘터리적이다. 집에 가고 싶어 하거나, 항공권을 취소하는 것이 지극히 귀찮아서 비행기를 그냥 탄다.
두 곳의 공항에서만 10시간을 보냈던 공항 와이파이의 날에도 이렇게까지 집에 가야 하나(그냥 눌러앉을걸 그랬나)하는 생각보다는 그냥 예정에 없던 공항투어를 즐겼다. 집에 오는 길의 변수를 즐기되 집에는 온다. 그러니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상상은 어디까지나 여행 '계획'의 일부로 존재하는 변수다. 상상력의 영역이고 실현가능성은 없다. 여행 하수(?) 시절에 그렇게 환승을 많이 했는데도 비행기를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정식으로 스탑오버라는 것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왕복 다섯 시간이 채 되지 않는, 가까운 곳으로 잠깐 다녀올 예정이다. 동시에 내년에는 80일 세계일주를 하겠다는 결심을 굳혀 본다. 원래 가려고 했던 2020년 파리 여행과 15년 전에 가려고 했던 스페인 여행과 27년 전부터 준비했던 유럽 일주를 통합했다.
방금 아주 소름 끼치는 사실을 발견했다.
유럽 여행 계획으로 수업했던 학생들이 22세가 되는 해에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2024년에 유럽일주를 하기로 했었다. 그동안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그들과 함께 갈 확률은 희박하다. 아마 나 혼자 끊임없이 세뇌를 했을 것이다. 늦어도 2024년에는 꼭 가자고. 그전에도 가려는 계획은 있었지만 계속 다른 곳에 가다가 브레이크가 걸렸고, 여권만료일은 이제 2.5년이 남았다. 여권을 갱신하기 전에 두 번은 나가보고 싶다.
두 번이지만 길-게.
서울 산책은 가끔 허망하다. 지도에 핫플이 모여있다고 나오는 지역에 와보면 리모델링한 지 얼마 안됐는데 레트로풍으로 인테리어를 해서 언밸런스한 술집만 가득하다. 밤에 오면 지저분하고 어지러운 모습이 상상된다. 낮에 오면 재미도 감동도 없다. 다 머지않아 망할 곳들처럼 보인다. 핫플은 핫플이라고 우겨서 되는 것이 아닐 텐데. 그럼에도 유일하게 일찍 오픈하는 프랑스 카페는 웨이팅이 있다. 처음부터 갈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지나친다.
그냥 스타벅스를 갔어야 하나. 덕분에 또 하나의 속 빈 강정 같은 뜨는 동네(라고 우기는 동네)를 사전에서 지웠다. 이틀 뒤에 또 와야 하는데 그날은 스벅으로 직진해야겠다.
어제는 방탈출욕구가 식욕을 이겨서 궁금했던 브런치 카페를 공략했고 시티뷰가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익히 아는 곳이라 우이천으로 직진했는데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음악이 잘 안 들리는 음악분수와 이 동네 특유의 정돈된 화단을 보며 안구정화를 했다. 도심에서 멀어진 보상을 확실하게 하는 동네다. (글쎄 동물들이...) 이사오기 전보다는 왕복 한 시간 정도 추가됐지만 서점은 가까워졌다.
두 곳의 서점 덕분에 꾸준히 만족도가 오르고 있다. 전에 살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서점을 가려면 남의 학교를 쳐들어가야 하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광화문이 십 분 거리인데 뭣하러 그러겠는가. 지금은 광화문에서 멀어진 대신 교보문고향 디퓨저를 집에 들였다.
더 많은 장소를 발견하고 싶다. 서울이라는 곳은 경험상 실패확률이 아주 크다. 만족도가 높은 산책을 하려면 아는 맛 서점이나 아는 맛 공원에 가야 한다. 그중에서 지금의 최애 장소가 된 곳들이 대부분 올해 발견한 장소들이다. 우이천은 청계천보다 열 배쯤 좋다. 최고의 산책 명소였던 시카고 리버와 비슷하다. 조금 심심하지만 나름 재미있고 훨씬 깨끗하다. 삶이 비로소 만개하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