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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에서 춤 추지 않는 코끼리

댄스유전자, 함께여행, 이방인

아프리카 댄서를 보면 알겠지만 사피엔스는 원래 춤을 추려는 DNA가 있다. 아프리카에 남아있던 원조 사피엔스의 흥과 유럽으로 이주했던 이들의 인프라가 라틴아메리카에서 만나(는 과정이 바람직하진 않았지만) 어마무시한 무곡들이 발달했는데,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열정적인 무곡으로 손꼽히는 바로 그것들이다. 특히 더 좋아하는 장르가 있지만 넓은 범위에서 아프로 쿠바 음악을 다 좋아하기 때문에 굳이 열거하지는 않겠다.


이 무렵 조선인들은 흥을 주체할수 없는 이들을 연예계 또는 산 속에 고립시키는 한편, 그 고립된 계급을 약점삼아 착취했다. 지금도 상당히 많은 보통 사람들이 가무를 즐기지만, 그 과정이 어쩐지 고립되어있다. 같은 장르의 춤을 추더라도 다른 나라와 달리, 한반도에서는 일상과 경계가 있다.


미적 감각을 타고난 짐바브웨 어린이들


짐바브웨의 공항이나 쿠바의 해변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은 '철저하게' 연출을 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닌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연출과 비연출의 경계가 아주 모호하다. 여기서 모호하다는 것은, 프리댄스를 자연스럽게 추지 못하고 그마저도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 한편 타고난 춤꾼이라면 짜여진 안무에도 애드립을 보여주는 남다른 능숙함이 있다.


아예 흥이 없는 민족인 것도 아니라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운동신경이 없거나, 춤을 멋있게 추기에는 너무 유연해서 흐느적거리는 사람도 흥이 넘치면 리듬을 탄다. 그러나 그것이 남들 보기 좋은 모양새가 아니라면, 특히 발달한 '눈치'를 써서 적당히 흥을 제어해야 한다. 재능이 없지만 이제는 간헐적 부캐가 된, 댄서라는 정체성은 오히려 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짐바브웨까지 가서도 동행한 한국인들의 시선을 의식해야만 하는 상황은 동행이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있는 장점과 거의 맞먹는 안타까움이었다.



짐바브웨 전통 공연에 사용하는 악기


무당 무(巫)와 춤출 무(舞)는 어쩌다 같은 음을 쓰는 걸까. 왜 나는 외국에서도 무당처럼 춤을 추면 안 되는 걸까. 물론 말리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


내가 나를 말리고 있는데, 나를 말리지 않고 훗날 뒷말을 하는 친구와 같이 말리는 친구 중에서 결과적으로 어떤 친구와 관계가 지속될지 알 수가 없다. 이미 십 년쯤 전에 '공부'하는 행위를 말리는 친구는 거리두기를 하겠다고 결심했지만, 이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러니까, 외국에서라 해도 외국인들이 굳이 나를 말리지 않는 이유는 아직 친구도 아닌데다 내가 이방인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선의의 방치랄까.


외국에서 자유로운 것은 이방인 뿐이다. 그렇다면 그 자유는 외롭지 않을 권리와 맞바꾼 일시적 자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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