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는 남반구, 이민은 플로리다
얼굴을 한참 긁다가 잠에서 깼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종종 있는 일이긴 하지만 오늘은 잠들기 한참 전부터 간지러웠다. 삼복더위에 공연 분장을 하고 마스크를 쓰고 (불금에) 심야버스를 탔다가 답답해서, 길을 아는 동네가 나오자마자 내려버렸다. 내려서도 마스크를 벗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눈화장은 일부 제거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분장이 지워지다 말아서 새벽 2시에 마주치면 무서웠을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을 한 것도 이미 3킬로미터쯤 걷고 난 뒤였지만. 아는 동네에서 집에 오는 길에는 그 시절 즐겨찾던 타이스파도 있고, '레베카, 나의 레베-카'를 10미터 앞에서 봤던 공연장도 있고, 유지기간이 어마무시한 심야 네일샵도 있는데 우선 배가 고팠다. 길에서 퍼지지 않고 집에 빨리가기 위한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 마침 경로 위에 보이는 단골 요거트 아이스크림 가게에 포장주문을 넣고 파워워킹을 했다. 불꺼진 상가에서 목적지를 찾느라 조금 늦었지만, 아이스팩 포장상태로 냉장고에서 잘 쉬고 있던 야식을 픽업하고 마지막 1킬로미터를 성실하게 걸었다.
삼복더위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여유있게 쉴 틈은 없었다. 남은 산책 코스는 쾌적했다. 물이 불어난 청계천과 성북천 사이에서 물멍을 때리면서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좋겠지만 지워지다 만 분장을 하고 청계천에서 새벽 3시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정말 무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남은 거리도 얼마 되지 않으니 적당한 골목을 뚫고 나와 큰 길을 건넜다. 그떄부터는 아는 동네가 아닌, 우리 동네이니까.
결국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나니 4시가 훌쩍 넘었다. 얼굴은 아직도 그 상태였다. 구부정하게 휴대폰에 코를 처박고 싶지 않아서 오랜만에 켠 TV로 20세기 히트송을 시청하고, 영화인지 드라마인지 모르겠는 채널들을 훑다가 결국 극장에서 두 번이나 봤던 <늑대소년>에 정착했다.
좀 오글거리긴 하지만 여전히 참 예쁜 영화다. 두 번 볼만 했어. 두 가지 과일과 연유에 시리얼, 서비스로 받은 치즈와 과자까지 올라간 아이스크림으로 당 보충을 실컷 했더니 바로 쓰러지진 않았다.
버스 하차후 걸어 오는 동안 열이 잔뜩 오른 상태로 아이스크림과 에어컨과 겨울노래와 겨울영화를 상대했더니 이미 추워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나 땀을 흘렸던지 그렇게 추워하면서도 끈적임을 느꼈고, 이 무렵 얼굴도 간질거리기 시작한 듯 하다. 속눈썹 풀에 살아있는 속눈썹이 뽑혀나오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씻고 다시 태어나보니 오늘은 좀 잘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잠시, 결국 잠결에 얼굴을 긁는 무아지경에 빠졌다가 그 상태를 깨닫는 순간 잠은 저 멀리 밀려나 있었다.
이제는 국밥을 먹어야 잠이 오겠군. 이런 생각을 하는 틈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날씨 앱에 접속한 시점에, 아직 비가 오기 전이지만 강수확률이 100%였고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 무렵, 8월 중순의 짐바브웨는 정말 시원하다. 우리나라가 타들어가다가 푹 절여지는 8월에서 (남반구니까) 6개월을 빼면, 늦겨울인 2월이다. 나는 환승만해서 제대로 가본 것은 아니지만 대륙의 남단, 남아프리카는 더 추울 것이다.
짐바브웨 북부의 8월 날씨는 4계절이 다 있었다. 남반구의 절기와 위도상으로는 봄이라고 봐야하는데, 사파리의 풍경은 가을에 가깝고 한낮에는 물놀이가 가능한 한편 이른 아침에는 추웠다.
빅토리아 폭포 에 가는 날에도 당연히, 팔이 없다시피 한 반팔을 입고 나섰더니 현지인들은 내게 스웨덴에서 오셨냐고 했다. 아, 스웨덴 가고싶죠. 하지만 진짜 겨울, 그것도 스웨덴 북부의 겨울은 정말 걱정스럽다. 내가 스웨덴에 살았다면, 여름에는 거의 안 자고 겨울에는 거의 자기만 할 것 같다. 여름에 세가지 일을 하고 겨울에는 실업수당을 받으려 할지도 모른다. 시원한 여름에 조금은 기대가 되는 한편 밤이 없는 건 싫은데, 난 nighthawk인데.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로 번역된 nighthawks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제목이자 그림에 등장하는 심야카페의 올빼미족이다.)
스웨덴은 너무 춥고, 짐바브웨는 너무 건조하고, 한반도는 너무 습하다. 그래서 또 마이애미 얘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파도에 휩쓸려서 사라질 뻔 한 적도 있고 허리케인도 왠지 무섭지만, 플로리다와 한반도의 유사함에 심리적 안정을 느끼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밖에서 보면 여기야말로 휴전국인데다가 날씨도 변화무쌍하고 태풍의 참새방앗간이 아닌가. 이 나라 사람들의 용맹함은 여기서 태어나보지 않고는 흉내낼 수 없을 것이다.
버러지 같은 놈들은 어차피 전 세계에 널려있고 스웨덴, 미국에도 네오나치가 있는데 한국어 하나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애송이들과 싸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힘 아껴서 영어라는 무기를 장착하고 더 논리적인 진짜 나쁜 놈들과 제대로 싸우고 싶다. 현실에 눈이 가려 앞만 보고 살게되면 가끔 스스로를 부적절한 리그에서 굴리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기사도 정신으로 무장한, 젠틀하지면 여성혐오적인 젠틀맨도 많고 유색인종과 자매애를 나누지 않는 백인여성도 있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백인여성 작가, 백인남성 배우는 'black lives matter'와 'Trump out'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좋아한 것은 아니지만 좋아하다보니 그렇지 않은 차별주의자들은 그 전에 이미 거른 것 같다.
예술가, 그것도 상업 예술가 계열이라고 해서 정치적 발언도 못하게 하는 우리나라 언론이나 어르신, 젊은 마초들은 상대할 가치를 못 느낀다. 이런 부스러기들을 생각하는 시간조차 아깝다. 그래서 뉴스도 인스타 친구들이 걸러주는 것만 보게 되는 것 같다. 정말 중요한 뉴스는 누군가 전달하니까.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