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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바브웨 여행 이후의 영화보기

라이온킹 실패, 다이하드 시리즈도 뉴요커였어

짐바와 꼭 닮은 연기사자가 등장하는 <라이온킹> 실사영화를 보다가 말았지만 계획없던 연휴에 작고 확실한 행복을 적립하기 위해 <다이하드3>를 봤다. 인생영화 리뷰도 해야하는데 이건 급한 일 보다는 중요한 일이고, 내게 급한 일이란 행복지수를 빠르게 올려 다시 (평일을) 달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타이타닉>과 맞먹을 정도로 많이 본 영화가 <다이하드3>일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본 이유는, 미국에 다녀와서는 한번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귓속에 남아있는 듯한 '나무야, 나무!'라는 더빙 대사가 뉴욕 센트럴파크의 나무였다니.


그땐 몰랐다. 당연히 몰랐지. 이 영화는 뉴요커만 알 수 있는 코드로 가득한데,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재미있었다. 아마도 몰래 먼저 영화를 본 아빠가 문제의 수학문제를 내주었을 때 마침 방과후 수학연구반에서 그 문제의 풀이법을 이미 발견했던 6학년의 나는 30초만에 답을 했고, 아마도 그 영화가 무엇인지 궁금했을 우리를 위해 아빠가 비디오를 빌려와 주셨던 것 같다. 몇년 후 공중파에서도 더빙판을 방영했는데, 우리는 그걸 녹화해서 수도없이 봤다. 정확히는 동생이 계속 봤고 나는 그냥 옆에 있었다. 그럼에도 공원 카레이싱은 잊혀지지 않는다. 생수통 들고 싸우는 두 아저씨도.



짐바브웨 여행에서 만난 빅토리아 폭포


설 연휴에 봤던 신상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에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할아버지가 나온다. 바로 <다이하드3>의 악역인 사이먼(제레미 아이언스)이다. 며느리(레이디 가가) 한 명이 구찌가를 파탄내는 그 영화와 다르게 <다이하드3>에서 유일하게 한 사람 몫을 하는 여성 캐릭터가 '대사없는' 단역으로 등장한다. (그나마 유일한 여경으로 등장하는 배역이 '니들이 여자말을 들을리가 없지'라고 말하고 선생님들을 도와 아이들을 피신시키는 역할을 도맡는다. 그런데 이것도 여경이 당연히 자원하는 임무인 듯 아무 설명이 없다.)


그 시절에 태어난 아이들이 문화생활의 주요 세대인 이삼십대가 되어버린 2022년 현재, 티비 속 뉴욕 경찰은 많이 진화했지만 여전히 구닥다리 공무원 세계를 풍자하듯이 인종/성차별에 둔감한 캐릭터를 등장시키긴 한다.


<브루클린 나인나인>이나 <캐슬>을 필두로 자기 색깔을 유지하는 여성 형사 캐릭터가 승승장구하고 있고 오바마 정권때 시작한 드라마 중에는 '반장님이 흑인'인 수사물이 많았는데, 대부분 종영했거나 곧 종영할 예정이라 아쉽다. 사실 어찌어찌 승진을 했다 뿐이지, 이 경찰 아저씨들도 주택가에서는 똑같이 '흑인이라' 의심받는 사건도 일어난다.



보츠와나 초베 국립공원의 야생 기린들



민심은 사무엘 잭슨의 <다이하드3>에서 별다른 진전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트럼프 퇴행 효과) 뉴욕의 '인종차별'이 실제로 어땠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여행자와 대화를 나누는 서비스업 종사자는 대부분 흑인이나 히스패닉이라 우리끼리 인종차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미국에서 오래 생활하신 분들은 흑인이 백인과 아시안을 다르게 대한다고 한다. 한편 아이비리그는 인종제한 때문에 아시안이 (성적이 너무 좋으니까) 흑인보다 입학하기 어렵다고 한다.


미국 드라마를 시간 역순으로 보면, 아시안과 라티노스에게 서번트 이상의 배역이 주어진 역사가 가장 짧다. 이 시기에 흑인은 이미 주요관직까지 진출했는데, 나는 그것을 오바마 효과로 본다. (트럼프 정권의 작품을 따로 골라내서 분석하진 않았지만, 대체로 최신작은 결이 다르다.) 2000년대 이전에는 라티노스와 아시안의 비중이 확연이 줄어들고, 한국인 배역을 맡은 연기자가 한국어를 못하는 일이 태반이었다. (아직까지는 남, 북한이 꾸준히 등장하긴 한다.) 이 시기에 가장 유행했던 재난영화나 로맨틱 코미디에는 출연빈도 순으로 5위 안에 흑인 또는 기타 유색인종이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내가 좋아했던 배우도 맷 데이먼, 라이언 필립, 캐서린 제타 존스, 리즈 위더스푼, 사라 미셸갤러 등 대부분 백인이었다.



짐바브웨에서 한국에 오는 중인 아기사자


한편 <라이온킹> 인터네셔널 투어를 보러갔을 때, 문득 이 작품에는 '인간'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연은 박스석 쪽에 있는 타악기 연주로 시작되었다. 연주자들과 사자 분장을 한 배우들은 대부분 흑인이었다. 내한공연이 아닌 번안 뮤지컬이었다면 몰랐을 것이다.


<라이온킹>의 등장동물은 다른 인간중심적인 공연의 등장인물과 달랐다. 캐스팅 기준도 달랐을 것이고 에너지도 달랐다. 무대에 몰입하는 순간 아프리카의 사파리가 느껴져야 했다. 애니메이션 <라이온킹>이 바로 그랬으니까. 이미 '라이브'로 사파리를 보고 왔기 때문에 실사영화는 재미가 없었다. 차라리 아프리카계 배우들이 출연하는 뮤지컬을 한번 더 봐야겠다.


(사자를 입양한 코끼리 시즌1_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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