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우유부단한 날의 산책
비구름은 실시간으로 다가오고 날씨와 상관없이 가장 귀찮은 날, 마냥 드러눕고 싶은 날이었지만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나왔다. 지나치게 이른 시간은 아니다. 이른 저녁을 먹고 러시아워에 커피를 마시고 커피를 가장 좋아하는 멘탈을 일으켜 세워 보람찬 하루, 또는 정신없는 하루를 보낼 것이다. 밤에 잠깐, 아침에 잠깐 일어나서 책을 읽었지만 며칠째 집에서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배달시킨 대용량 아이스커피나 (분말차 제형의) 비타민워터로 연명하면서 호시탐탐 밖에 나갈 기회만 엿봤다.
집에서 눈을 반쯤 뜨고 뜨거운 커피를 내리는 것이 지난 4년 동안의 모닝루틴이었다. 수면주기가 (다양한 이유로) 바뀌거나 아프거나 (그래봐야 코로나 두 번이 전부지만) 조금 길어진 외출 또는 기억나지 않는 만취귀가를 겪고 나면 어리둥절한 상태로 모든 걸 리셋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리셋의 첫 단계는 대부분 커피였다. 집에 쌀은 없어도 커피는 있어야 했다. 지금도 커피는 있다. 드립백 커피와 캡슐 커피를 주문하는 방식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주문을 할 것이냐 먹어치울 것이냐를 고민하기 싫어서 커피믹스도 사두었다. 커피믹스를 일부러 챙겨먹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있으면 든든하다. 선택지가 늘어나는 것은 좋다. 너무 과하게 늘어나지만 않는다면.
어제 많이 잤고 오늘은 잠이 부족하지만 깊이 따지지 않고 그냥 나왔다. 그런 관성이 필요했다. 일단 나가고 보는 관성. 피곤하고 비가오고 귀찮고 집에 읽어야할 책이 있고 이런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나올 수 없으니까, 오늘은 일단 나왔다. 일단 저녁을 먹고 생각하려고 했다. 저녁을 먹으니까 생각하는 건 귀찮고 드러눕고 싶은데 이미 밖이다.
이미 밖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거의 다 마셨다. 지금 들어가도 잠은 안 온다. 집에 처박혀있는 시간의 비중을 급속도로 줄였더니 다른 관성도 보인다. 귀찮음이 지배했던 시간에는 오히려 직진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나는 꽤 많은 갈림길에서 망설인다. 한번도 뒷문을 사용하지 않았던 건물에서 잠시 고민한다. 그러다 마음을 다잡고 앞문으로 나왔다. 이런 관성이 몇 달 전이나 몇 년 전에 없었다고는 못한다. 그건 아주 오래된 망설임이다. 가지 않은 길 뿐만 아니라 갈 필요가 없는 길에 대한 기웃거림.
저기가 더 좋을까? 까지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생각하긴 했다. 저쪽으로 갈 건데 지름길이 아닐까? 그러나 출구 방향(한쪽이 막힌 경사로였다.)으로 보나 그동안 앞문으로 나와 좌회전을 두 번 했을 때 한번도 지름길을 본 적이 없었다. 뒷문을 보고 다시 원래 방향으로 돌아오는 1초 동안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앞문으로 가자. 혹시라는 생각에 길을 잃었던 적도 있고, 비교적 최근에도 막다른 길에서 좌절한 적이 있다. 가끔 어떤 빌라의 주차장과 같은 사유지는 통로로 사용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투명한 담을 설치한다. 큰 건물의 뒷문이 오히려 길이 될 가능성이 높다. 모험이나 방황이 목적일 때가 아니면 그냥 아는 길을 선택하기로 한다.
모험이나 방황을 해도 되는 날이 있다. 즉흥적 요소가 없는 삶은 견디기 힘들다. 대체로 변수가 더 많은 선택지를 (남몰래) 선호하지만 겨우 칩거라는 관성을 물리치고 생활의 중심을 갓 집 밖으로 이동시킨 참이다. 집 밖의 어느 곳, 한 곳으로 정해지지 않았지만 불특정 다수의 장소는 아닌 곳. 아지트 중에 하나. 오늘은 아지트가 유난히 반기는 느낌이다. 별다른 이벤트는 없지만 그런 날이 있다. 귀찮음을 품고 일단 나왔는데 굳이 모험까지 할 필요는 없다.
아마 오늘도 이미 가 본 장소만 방문할 것이다. 새로운 장소를 개척할 시간은 앞으로도 많다. 아침 또는 낮에는 익숙한 장소에서 모닝루틴을 시작하고 티타임이나 러시아워에 더 괜찮은 혹은 예비의 선택지가 될 만한 장소들을 탐색해봐야겠다. 지난 설날 연휴의 경험에 의하면 아침 일찍 문을 여는 곳은 스타벅스밖에 없으니까, 스타벅스 카드도 충전해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