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너머를 볼 수 있다는 것
자기계발서를 읽지 않고 있고, 자기계발서와 교집합이 있는 책이어야 베스트셀러가 되는 (그러나 이미 너무도 오래된) 풍조에 넌더리를 내는 사람 중 한 명이지만 그렇다고 '자기계발서를 읽지 않는 사람'으로 내 정체성을 규정하고 싶지 않다. 실제로 그런 반발심이나 거부감을 자신의 프로필에 드러내는 사람도 꽤 많은데 특정 장르만 추구하는 독서만큼 특정 장르만 거부하는 독서도 위험하다.
그러니까 편협하다. 그런 프로필을 발견하면 후진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체 독서인구 대비 '편협 독서'를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인구의 비율이 저절로 계산되며(물론 착시효과가 크겠지만) 자기계발서의 독점적 세력화가 낳은 또다른 부작용에 넌더리를 낸다.
나는 일생일대의 역전기회인 '수능'을 놓치지 않으려고 청소년기에 최소 열 권 이상의 자기계발서를 정독했고 그 결과 교과서와 최소한의 개념서와 인지도 있는 출판사의 대표 유형서만으로 수능 1등급과 면접, 논술까지 올킬했다. 자기계발서를 읽으려면 더 일찍, 아예 일찍 읽어야 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지만 지금 필요한 지혜는 (독서가라면 아시다시피) 고전에 있다. 그래서 중년 독서가(혹은 인스타그래머)가 체감상 조금 늘어난 것 같은 이 시점에 끊임없이 고전가이드가 리뉴얼되고 있는 것 같다.
내 영어능력은 상당부분 자기계발서에 빚지고 있는데, 보다 정확하게는 영어능력자로서의 자아가 있다면 그 척추를 구성하는 스승이자 저자가 데일 카네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데일 카네기의 모든 사상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흡수했을 뿐? 아니지, 비판적으로 흡수했다. 블로그에 필사한 그의 문장에서 구닥다리가 된 police man과 불특정 단수 주어 he는 중성적 표현인 police officer와 복수가 아닌 단수로 쓰이는 they로 수정했다. 카네기의 (주로 여성인) 유족들이 관리하는 개정판에서도 이런 단어들이 수정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로는 굳이 그의 오글거리는 문장을 읽고 싶지 않지만, 국내에서도 계속 개정판이 나오고 있다.
데일 카네기 정도면 이미 고전이다. 탈무드급 고전은 아니더라도 우리가 실제로 읽지 않는 그리스 철학자나 데카르트만큼의 영향력은 있는 것 같다. 탈무드를 실제로 읽은 사람은 몇이나 될까? 펭귄 영어판으로 탈무드를 사두긴 했는데, 어떤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읽기 시작하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최근에 나온 책들 중에도 쓸만해보이는 책이 많으니까. 실용서, 자기계발서도 목적에 따라 적절하게 활용할 예정이다.
다만 내 비문학 독서는 (가끔 작법서를 읽는 것을 제외하면) 자기계발보다는 총체적 관점의 확장, 즉 과학 그 자체와 역사 그 자체를 새롭게 보는 시각을 간접경험해보는 것이 목적이다.
과학 그 자체는 이과 30년차에게 새로운 관점이 아니다. 하지만 대학교에서 기초과학부터 원서로 수강해야하는 (독서가로서의)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은 이후 기나긴 영포자, 수포자의 터널에 들어섰다. 요약하자면 중고생의 영수 과외, 독일어를 포함한 인문대의 모든 교양과목과 그밖에도 교재가 한국어인 모든 수업에 차질이 없었다. 심지어 수학적으로 문제해결을 할 수 있는 전공과목은 교재가 원서여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한동안 나는 졸업가능성이 불투명했고, 졸업을 하더라도 절대 대학원은 가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미리미리 해버렸다.
영어가 문제였다.
정작 졸업을 하고 나니 어지간한 그룹에서는 영어 담당자가 됐고 (물론 메이크업 담당자도 됐지만 이건 졸업 전에도 그랬고) 그러다보면 영어실력이 녹슬 틈이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산악 자전거를 못 타지만 일반인 중에서 일반 자전거는 잘 타는 편이었고 계속 자전거 담당으로 살다보니 더 잘 타게 됐다는 이야기다. 자전거는 오히려 몸이 기억해서 잊어버리지 않는다던데, 나는 스무살에 딱 두 번 자전거를 배우지도 않은 채 바로 타기 시작한 날 도로주행을 나가서 덤프트럭과 경주를 했던 아찔한 경험 때문인지 그 후로는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스피킹이 저는 가장 쉬웠어요, 라고 말하는 이유는 한국어 문화권과 포스트 한국어 문화권의 차이에 있는 것 같다. 처음 스피킹이 떡상했던 시점은 홍대 클럽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와 대화를 나눈 직후였던 것 같다. 한국어 문화권의 금기, 특히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다 초면인 남성과 어느 정도로 거리를 두며 어느 정도로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지 따위를 신경쓰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영어가 주는 해방감 중 하나였다.
반면 한국 사람들, 중에서도 영어를 잘한다고 분류되는 사람들이 잘하는 독해나 문법은 지금도 그리 자신이 없다. 수능 영어 점수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고, 토익은 올랐지만 토플은 제자리다. 첫번째 미국여행을 가기 전 하루종일 CNN을 틀어놓고 영어 환경을 조성했지만 그때만 해도 토익단어의 스펠링에 확신이 없었다.
분야가 문제였다.
정치, 경제는 일단 노잼이다. 영어를 목적으로 일단 오디오북을 활용하고 있던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읽으면서 영어 리부트를 하고 두번째 미국여행을 다녀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영어보다는 인간관계만 업그레이드된 것 같았다. 예전에는 비한국어권 인간관계가 압도적으로 편했다면, 데일 카네기 이후로 한국어권 인간관계도 나름 괜찮아졌다.
마지막 귀국을 앞두고 미국인 과학자(유튜버 김아란의 배우자)의 내한 강의를 신청했다. 그 마지막 귀국 직후부터 '그래, 과학이야'를 외치며 영어로 기초과학을 재주행했다. 전공 학위를 받기까지 여러번 반복했던 과목을, 같은 분야의 선생님과 같은 공간에서 이야기하면 모든 문장이 들리지 않더라도 커뮤니케이션이 된다. (심지어 전공자 반, 원어민 반인 그 엄숙하고 견제하는 분위기에서 질문도 했다!) 그 수업을 소화하는 동안 발견한 <영어로 과학> 시리즈 덕분에 (한국어로만 가능했던) 수학 수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초 용어도 손 닿는 곳에 장전했고, 토플과 GRE 빈출인 지구과학의 기본 개념들도 오랜 시간에 걸쳐 재주행했다.
영어 리부트에 드디어 날개가 달리는 시점에 팬데믹이 와서 여행계획은 좌절된 한편 영어공부에는 가속이 붙었다. 이제 좀 읽을만해진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직접 요약하면서 토플 레벨의 단어장을 속성으로 떼고 GRE레벨로 올라탔다. 그러다보니 읽다가 던져둔 스티그 라르손 영어판이 읽혔다. 그게 팬데믹 1년차였던 2020년 4월 5일이었다. 영어 챕터에서도 다 했던 이야기다.
영어가 주 원인은 아니었지만 영어책을 읽을 수 있을때까지 한국어 독서를 참았고, 금독령(?)이 풀리면 읽으려고 벼르고 있던 책이 <사피엔스>였다. 영어가 읽히는데, 그것도 잘 읽힌다는 생각 들자마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3부작을 쟁였다. 이미 재난 지원금으로 중고 원서를 쟁이고 있었고, 이미 읽던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3부작을 계속 읽고 있었지만 영어패치가 생긴 후 초독을 영어로 하고 싶었던 책이 <사피엔스>였다니.
지금 생각하면 좀 이상하지만 그땐 <인간관계론>만 몇년 동안 읽고 있었으니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유발 하라리는 데일 카네기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내가 교재를 잘못 고른 것일수도 있지만 데일 카네기는 초독이 너무 힘들었고, 반복에 반복을 거듭해서 덕분에 영어의 신이 될 법한 책이었다. 이걸 읽다 유발 하라리를 읽어보니 쉬운 이야기도 아닌데 아주 쉽게 읽혔고, 계속 무릎을 치며 감탄했고, 그의 문장력에 반했고...(한국어로 읽으면 모를 것 같은 라임도 엄청나니 찐팬이라면 꼭 영어로 읽어보기를!)
무엇보다 꿀잼이었다.
내가 영어의 신처럼 느껴지는 기분은 덤. 이건 유발 하라리와 데일 카네기의 합작이다. 매운맛으로 단련하고 천재의 순한맛으로 가장 취약한 '세계사' 과목을 단기간에 정주행해보니 세상에 못 읽을 책이 없었다. 그렇게 '역사와 비문학은 재미없어.'라는 내 안의 고정관념이 깨지고 시야가 조금 넓어졌다.
영어권에서 한동안 꽤 인기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이 작가여야 해? 라는 생각도 든다. 스티그 라르손 영어판과 유발 하라리 이후 영어책이라는 너무도 활짝 열린 가능성의 바다에서 에드거 앨런 포(번역서 읽고 바로 도전), 해리엇 비처 스토, 요 네스뵈(최애작가니까) 영어판, 그리고 말콤 글레드웰을 골랐다. 예상대로 완독은 해리엇 비처 스토가 오래 걸렸고 말콤 글레드웰은 문체에 적응하는데 오래 걸렸다. 소설도, 자기계발서도, 역사서도 아닌 그의 문체는 신문이나 잡지를 즐겨읽지 않는 내게 넘어야 할 산이었다.
영어권 작가들의 상당수가 저널리스트 출신이고 뉴욕드라마 <가십걸>의 댄 험프리만 봐도 작가와 저널리스트의 경계는 주 수입이 어느 분야인지와 같은 아주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비문학에 (여전히) 거부감이 있는 소설덕후에게는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말콤 글레드웰을 알아가려고 애썼던 시간들이 남긴 것은 영어도 그의 통찰도 아닌 바로 그것, 르포 계열의 비문학에 대한 열린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한국사람이 한국어로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주장하거나 잘난척하거나 강의하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한편 저널리스트 경험이 있는 소설가의 비문학만 덕질하는 기행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소설가로도 성공할 수 있는 문장력을 가진 작가라면 당연히 그에게 익숙한 비문학 장르에서도 와닿는 필력을 구사하겠지. 물론 강의나 설명서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작가들도 있다. 게다가 최근에 활약하고 있는 저자나 서평가들 상당수의 본캐나 예전 직업이 교사인 경우가 많다.
책을 쓰고 강의를 하거나 강의를 하다 강의록을 책으로 엮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만, 베테랑 중에서도 베테랑만 가려내야 한다. 한가지 팩폭을 하자면 하루에도 수만 권의 신간이 나온다는데 나는 아무리 빨리 읽어도 이틀에 한 권 밖에 읽지 못하고, 영어패치 까는 동안 읽지 못한 고전과 스테디셀러도 쌓여있고, 이미 인생책이라 재독할 책도 많다. 아무 책이나 읽을 시간이 없다. 그래서 책 고르는데 공을 들인다. 그리고 나름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말콤 글레드웰을 한번 더 소환하자면,
블링크가 있어야 한다.
영어로 매운맛이라 한국어로도 읽으면서 한겹한겹 뜯어먹고 있는 리베카 솔닛과 마거릿 애트우드, 한국어로 다시 읽고 싶지는 않았는데 영어로 읽다 좋아하게 된 제인 오스틴, 아직 책만 샀거나 구입 예정인 고전들과 20세기 대표작과 비영어권 작가들.
특히 그동안 등한시(?)했던 한국 작가들의 밀린 업적을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다. 마침 이 시점에 역주행하고 있는 작가들도 있고 나만 모르는 99명의 작가들을 또 어떤 순서로 읽어야 하나. 그렇다고 영국언니, 미국언니를 다 읽은 것도 아닌데.
상황이 이렇다보니(?) 영어와 한몸(?)인 비문학은 책만 사고 미뤄두었다. 딱히 급한 책도 없고, 굳이 말하자면 소설보다 더 음미해야하는 책들 뿐이고, 굳이 말하자면 번역서로는 지루할 것 같은 책들 뿐이다. 작년에 잠깐 뽐뿌가 와서 50% 읽고 방치한 <코스모스>는 또 어떤가. 확실히 천문학은 내게도 생소한 분야인 동시에 끝없는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냉정하게 얘기해서 칼 세이건이 박상영보다 재미있지는 않다. 급하지도(?) 않다.
그게 고전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언제 읽어도 좋기에 언제 읽어도 '늦지 않은' 대신, 언제 읽든 상관없으니 '급하지도' 않다. 그러나 생존 작가, 특히 젊은 작가의 신간은 멈칫하다 구간이 되어버린다. 이미 다음달로 밀려났지만 나름 새해의 포부였던 박연준의 신간도 이미 구간이 되었고, 다음주에 읽으려던 고전 한 권을 빼고 쏟아지는 신간을 받아들이기 위해 바꿔치기한(?) 정보라의 구간은 이제 구간 중에서도 묻혀버린 구간이 되었다.
이미 구간인 이 책을 구입한 이후 반년동안 새로나온 책이 몇 권이더라?
정신없이 탐닉하게 되는 문학의 바다를 등지면 쟁여놓고 세월 탓을 하고 있는 거대한 비문학의 산맥이 보인다. 그리고 이 넓디넓은 해변에 널부러진 논픽션. 가이드북보다는 확실히 예술성이 있는 여행에세이와 맛을 알면 끊을 수 없는 필력가들의 회고록.
불과 2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는 단권작가나 마찬가지었던 비비언 고닉의 책이 쏟아지는 그 속도로 이 분야에 대한 독서가들의 열망이 우후죽순처럼 자라고 있다. 마케팅이 아닌 입소문으로 자리잡은 캐럴라인 냅은 또 어떤가. 이 해변에 존재하는 에세이와 평론과 새로운 형식의 이야기들은 분류 그 자체를 무색하게 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을 지식인과 예술가로만 규정할 수 없는 것처럼.
물론 철저한 자본주의 사업가는 저 산맥 너머에 존재한다. 애초에 그 산맥은 내가 만든 책탑이므로.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가끔 해변산책을 하면서 안부를 묻고 경계인들과 어울린다. 이쪽 해변에 아예 관심이 없다면 모를까. (바다와 해변에 아예 무관심한 이들은 '책'이라는 개념을 다르게 구사한다.) 어느 정체불명의 장소에서 애서가를 만났을 때, 이제는 무작정 반가워하기보다 조심스럽게 탐색한다. 그의 '책'과 나의 '책'에 공통분모가 있는지, 우리가 이 해변을 함께 걸을 수 있는지, 그의 해변과 나의 해변이 너무 멀리 떨어져있지는 않은지......
탐색하는 나 자신을 안타까워한적도 있다. 설령 그가 나를 폄하한다고 해서,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배척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지레 겁먹고 배척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공통의 논제가 있는지를 빨리 캐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넓은 세계에서 저급한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 시야를 넓히되 그 안에서 타인의 한계를 발견해야 한다. 내 시야가 좁으면 나 또한 볼 수 없다. 그가 이 너머를 볼 수 없는 것은 나의 탓이 아니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