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겨울의 책방산책>
가장 좋은 대리석 욕조 안, 반짝이는 글리터가 들어간 핫핑크색 버블배스와 향 좋은 배스밤을 따뜻한 샤워기 아래에 풀어놓은, 장밋빛이되 오색창연한 그 비누방울을 가장 좋은 난색 조명을 통해 관찰한 듯한 장면을 지우가 화폭에 재현하는 동안, 석류는 그녀의 발길이 왜 뜸해졌는지 궁금했다. 처음부터 그녀를 기다렸던 건 아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주말이 거듭되는 동안 그녀가 오는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기분 좋은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오랜만에 누나를 자주 봐서 좋은 건 그 다음 문제였다. 오랜만에 보든, 매주 보든 영지는 어디까지나 가족이기에 두려움이나 기분 좋음과는 무관했다.
가족이어도 두렵거나 기분이 좋을 수도 있겠지만 특별하게 가깝지도 않고, 다른 가족들보다는 서로에게 무심한 편이고, 어렸을 때 충분히 붙어있다가 사춘기 이후로 각자의 세계를 또렷이 정립했기에 가까이 살든 멀리 살든 유난히 그립다거나 부담스럽다거나 귀찮았던 적조차 없는 사이였다. 남매가 다 그렇지는 않다는 걸 둘 다 꽤 늦게 알았다. '누나 같은' 분위기나 역할(?) 같은 것이 있다면 그 형용사는 영지와 거의 관련이 없다. 영지 입장에서는 일부러 그런 셈이지만 석류에게는 '우리 누나가 특이하구나.'라는 결론이 찾아왔다. 누나가 누나 중에서 특이하면 좀 어때. (엄마가 엄마 중에서 특이하면 좀 어때.) 석류는 남들이 누나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별 관심은 없었지만 누나 때문에 엄마까지 무심해졌다는 농담 아닌 농담을 할만큼 누나의 절대적인 무언가를 무의식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뭘까.
나란히 걸린 영지와 지우의 그림을 봤을 때, 화려한 듯 단순한데 시그니처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서 방향성을 예측하기 어려웠던 영지보다 정갈하고 단아함 그 자체였던 지우는 사람도 단정했지만 딱 영지만큼만 단정했다. 예체능계에서는 모범생만 뽑아놓아도 가장 모범생처럼 생긴 영지만큼.
그러나 영지와 지우는 미술 전공도 아니고, 예체능계를 조금만 벗어나도 타고난 화려함이 돋보여서 삶이 피곤했다. 무대에 오르는 공연자들과 그 지인들 틈에서 비가시적인 노동을 수행하는 인테리어에 가까운 석류가, 퇴근하고 홍대 앞을 걸어가면 지나가는 익명의 누나들이 사방에서 레이저를 쏘는 것과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영지와 지우는 주로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가능성이 있는 만큼 또는 그 가능성이 때때로 과대평가 되는 만큼 익명의 언니들에게 레이저 이상의 관심을 받고 소규모의 테러 비슷한 것도 당해왔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가까운 곳부터 그 존재의 신비함이 사라지고 관계의 평화가 찾아오기까지, 영지와 지우의 사교적 행사는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다가오는 이상한 남자들 경계하기, 그런 것으로 트집 잡는 이상한 여자들과 말 섞지 않기, 괜찮은 남자들과 스캔들이 나지 않을 정도로 거리두기, 정말 괜찮으면 정말 조용히 만나거나 연락만 하기(이게 뭐람?), 안 친한 여자가 다가와서 우리만 배제해도 그러려니 하기(Seriously?), 그녀에게 선한 의도로 친절하게 말을 붙였을 때 그녀가 우리를 근본없는 짐승처럼 취급해도 정말 짐승처럼 달려들지 않기.
이성애자가 아니거나, 이성애자임이 정체성의 주요 포인트가 아니거나, 둘 사이의 남자라고는 공통의 혈연 밖에 없는 관계여도 여성들은 신경전을 한다. 여성들은 자신과 상대방이 얼마나 그 신기루같은 정체성과 일치하거나 일치하지 않는지, 스테레오 타입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알고도 답습하는지, 건설적 파괴를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를 가지고도 언어, 비언어, 침묵의 전쟁을 한다. (인생이 눈치게임이다!) 남성들도 동성간의 전쟁을 하는데 대체로 본인이 비가시적 전투에 초대되었는지도 모르고 상의를 벗는다. 여성들은 가진 것이 아무리 많아도 항상 부족하기에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여성'이 가진 것에 유난히 분노하기에) 끝없이 갈망한다.
예쁜 애 옆에 예쁜 애가 있는 이유는 그래야 덜 싸우기 때문이다. 영지는 지우가 예뻐서 좋아했지만 영지 자신을 질투하지 않아서 사랑했다. 지우는 깐깐하지만 동성친구에게만큼은 지극히 너그러웠고, 영지는 애초에 다른 여성들을 이길 생각이 없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은 대부분 '남성'이 가졌는데 왜 동성과 싸워야 하나. 그냥 다 너 가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