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겨울의 책방산책>
목적지를 정했으니 일어나야 했다. 밝은 곳에 나란히 앉는 것도 처음, 조용한 곳에서 속삭이는 것도 처음. 책먼지를 빛내며 스며드는 오후 햇살만큼 머릿 속도 어지럽고 달콤했다.
"가자."
"저 책 한권만 검색해봐도 돼요?"
"응, 당연하지. 책 찾으면 내가 아까 보던 책이랑 같이 살게."
"안 그러셔도 되는데, 일단 검색해볼게요."
지우는 그들이 함께했던 서가로 돌아왔고 석류는 가장자리에 있는 도서검색대를 향했다. 서점에 오랜만에 왔더니 그동안 잊고 있던 제목들이 둥둥 떠다녔다. 게다가 서가에는 은은히 은밀한 분위기가 있어서 알 수 없는 스릴감이 느껴졌다. 책꽂이 사이의 틈으로 언듯 보이는 인접 서가의 인물이라던지 책을 훑어보는 동안 뜻밖의 단어와 그 연상으로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거나 현실 세계에 남은 육체가 괜히 혼자 부끄러워 한다던지.
석류는 두어 해 전 영지가 지나가는 말로 전해준 추리소설 작가의 이름을 검색해봤다. 재고가 많은 책은 예전에 구입해서 갖고 있었고, 다른 책은 없었다. 지우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책 한권을 골라보고 싶었는데 막상 둘러보니 마음을 정하기 어려웠다. 비슷하게 생긴 책이어도 반응은 완전히 엇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누나가 한 권 골라주세요."
지우는 아까 그 책을 다시 뽑았다가 아까 그 느낌이 아니라서 도로 넣었다. 게다가 그 책은 너무 무거웠다. 석류가 책을 가져온다면 내책 한 권, 그의 책 한 권을 함께 사고 싶었다. 가끔은 이런 콩 같은 소망이 참으로 원대해보였다. 지우는 여러 가능성을 검토해보는 작업을 진심으로 즐기는 편이라, 충분히 시간과 정신의 여유를 갖고 시작해야 하는데 타인의 존재는 여러모로 혼란스럽다. 시간이 촉박해도 혼자 결정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 촉박함이 순발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반면 타인과 시간제한(그들은 식당으로 이동하기 전의 틈새를 활용하는 중이었므로)이라는 이중고는 마치 무대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멘탈을 압박한다. 그걸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우는 아닌 것 같다.
석류가 자기 책도 골라달라고 하니, 정신도 차릴 겸 장르를 바꿔보기로 했다. 영화 원작 소설이 두루두루 무난할 것 같아서 약간 베스트셀러였던 책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석류는 조용히 아주 약간의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읽어본 책을 골라야 할 것 같은데, 이왕이면 영화까지 본 책이 좋을텐데. 책등을 훑어보다 지우는 자신이 책과 영화 중에 하나만 보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만 깨우쳤다. 그렇다면 원작을 읽은 후보군에는 뭐가 있을까? 나를 찾아서, 이건 둘 다 안 봤고 헝거게임, 이건 영화만 봤고. 아, 저기 핑거스미스가 있네!
"이 책 좀 두꺼운데 읽어볼래?"
"네, 안 비싸면 괜찮아요."
"구간이라서 엄청 비싸진 않아. 사줄게."
"누나는 아까 그 책 안 사요?"
"다른 책 사려고."
새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와 수전 콜린스의 <헝거게임> 1권을 뽑아서 계산대로 가져갔다. <핑거스미스>가 좀 무겁지만 석류가 들고 다닐테니 뭐.
"봉투 구매하세요?"
"네."
그래도 선물이니까 봉투는 있어야겠다. 선물할 책을 봉투에 담아서 석류에게 건네고, 지우 자신이 가져갈 책은 가방에 넣었다. 책을 구입해서 가방에 넣고 나면 갑자기 갈증이 몰려온다. 자주 가던 카페는 폐업 또는 리모델링을 하는지 닫혀있던 것을 본 이후로 가지 않았다. 책방 건물에 있는 스타벅스는 항상 만석이지만 오늘은 어차피 식당으로 이동할 것이므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우는 계단을 내려와 건물 바로 앞에 있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대기를 했다.
석류는 말없이 옆에 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