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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Aug 30. 2024

자식은 다섯 명, 한편으로는 단 한 명

최진영 <단 한 사람>

그러므로 그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이별 또한 아니었다. 훼손이었다. 파괴였다. 폭발이자 비극이었다. -19p


​웅장한 프롤로그와 비장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정신없이 빨려들어간 날이 있다. 그날은 아주 많이 특이하게 시작되었고, 이미 이책에 손대기 전부터 예사롭지 않은 예감보다 빠른 손으로 기록을 하다 기분전환을 하려고 서가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어느새 이 무지막지한 책 속에 들어와있었다.


그날의 기록은 언젠가 등판하겠지만 지금은 그 무렵의 독서목록조차 스포일러여서(아무도 궁금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연관이 없어보이는, 혹은 연관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아직은 함께 소개하지 않을 책들도 소개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다.


어떤 책은 3년 전에 나왔는데 1년 전에야 그 존재를 알게 되었고 매칭포인트를 못 찾아서 대충 훑어보고 던져두었다가 뒤늦에 이 잡듯이 괄호 안에 들어있는 단어들까지 한톨씩 만져보고(마치 그러면 활자가 튀어나온다는 듯이) 어떤 책은 독후감이 살포시 예상되면서도 거의 20년 전에 사 놓고 안 읽은, 저자의 다른 책에 대한 사죄(?)를 담아 고이 모셔두었다가 어느 날 아침 계시를 받은 것처럼 읽기 시작해 이 책 안에도 계시 비스무레한 것이 나온다는 걸 깨닫고 또(아무도 보고 있지 않지만) 혼자 공연을 한다.




신문에서도 뉴스에서도 가끔 보는 드라마와 영화와 다큐멘터리에서도 1등은, 리더는, 전문가는, 박사님과 해결사는, 책임자와 대표는, 공로자는,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37p


열대 야자수인 워킹팜은 해가 들지 않는 곳의 뿌리는 죽이고 해가 드는 곳의 뿌리를 자라게 하면서 1년에 20센티미터까지 이동한다. 뿌리를 내린 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식물의 운명을 뒤엎은 나무. 씨앗. 온도. 습도. 토양. 뿌리. 줄기. 잎. 꽃. 열매. 어디까지를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114p


​신을 찾는 사람은 자기 속부터 들여다봐야 해. 거기 짐승이 있는지, 연꽃이 있는지. -142p




작품을 통해 전달된 것 이상으로 언니들의 이야기, 엄마와 할머니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예상대로 등장나무의 모델이 된 나무가 있었다. 나무이야기는 잔혹동화처럼 묘하게 끌리는 맛이 있다. 나무와 숲의 신비한 힘은 최진영 작가를 비롯해 정보라 작가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등이 즐겨쓰는 모티브다.


​첫번째 책 프사 촬영일에 폭풍빽빽해진 잎사귀를 자랑하는 내 나무친구를 만났다. 오늘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큰 이변이 없는 이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줄, 나무친구 한 그루 쯤은 사귀어 두는 것도 좋다. 책표지에 나무가 있어서 나무가 아닌 벽화를 배경으로 촬영했다. 오늘은 이런저런 우연의 조합으로 나무나무한 공간에 자리를 잡았으니 추가촬영을 했는데 단숨에 원픽으로 올라선 사진은 아직 없다.




익숙한 일은 익숙해서, 새로운 일은 새로워서 하고 싶었다. 그렇게 쌓이는 눈앞의 급한 일을 해치우다 보면 장기 프로젝트는 미뤄졌고, 미뤄둔 프로젝트는 어느새 급한 일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면 다시 무언가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하루하루 바쁘게 사는데도 누군가에게 일화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167p


장미수에게 자식은 다섯 명. 한편으로는 단 한 명.

-185p


사람을 구한다는 것에 꼭 목숨을 구한다는 의미만 있는 건 아닌 듯하다는 거야. 살아도 귀신처럼 사는 사람이 있고 죽어서도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이 있잖아. 내 동생이 하는 일이 뭐겠어. 신령에게 열심히 기도해서 산 사람을 살리는 일이거든. 근데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말이지 않아? -204p


​고래는 바다에 살지만 아가미가 없다. 기억은 영혼인가? 눈빛은 육체인가? 비처럼 내리는 눈이, 밤과 새벽에 걸친 시간이, 봄도 여름도 아닌 시기가,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물이 있다. 뒤섞인 존재가, 사이가, 현상이, 모호한 상태가 훨씬 많다. -214p




변화무쌍한, 이제는 초여름의 날씨를 두고 언젠가 화창한 서울을 마주보며 홀로 먹구름을 이고 있던 과천이 생각난다. 겨울이면 오리온자리가 선명하게 보이던 산기슭의 옛집도 생각난다. 지금도 맑은 날에는 오리온의 벨트가 보이지만 그게 그나마 최근에도 보이는 거의 유일한 별자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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