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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Aug 25. 2024

다른 삶을 진심으로 헤아리기

백수린 <여름의 빌라>

​끝나면 음악도 지휘자도 사라지지만, 손에 조약돌 하나가 쥐어져 있는 ‘수상한 환희’를 느낄 수도 있다. -추천사(박연준)


욕망이란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이를 두고 현명하다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에 기댄 채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는 이와, 충족의 실패 후 비로소 이 사실을 인정하는 이 중 어느 쪽이 정말 성숙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284p, 해설_나의 작은 세계에서 벗어나서(황예인)




<2023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백수린 작가의 단편 ‘빛이 다가올 때’를 읽고 나서 쥐고 있다 내려놓은 조약돌은 밤마다 야광별 스티커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읽고 잊어버린 ‘아주 환한 날들’을 다시 읽고(2022년 김승옥문학상 수상작) 리뷰하기 전에 <여름의 빌라>를 손에 넣어서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까지 읽어두었다. 그리고 백수린 작가가 번역한 보부아르의 유작을 읽었다.


빛의 화가, 아니 빛의 소설가.




<여름의 빌라> 완독을 앞두고 ‘수상한 환희’로 가득한 표지를 그린 화가가 왠지 익숙해서 확인해보니 알프레드 시슬레였다. 카유보트, 클림트의 엽서와 함께 구입한 시슬레의 풍경화는 청량하다. 군더더기가 없고 튀려고 애쓴 흔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누구보다 잘 아는 것 중 하나는 튀지 않는 것만큼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일도 없을 거라는 사실. <여름의 빌라>에 수록된 백수린의 화자들은 청소년기를 회상하면서 반복한다. 튀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121p, 폭설)다고, 어떤 면에서든 유달라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고, 그러는 일은 피곤했(244p,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다고.


시슬레를 발견하기 전, 여름을 남겨두고 <여름의 빌라> 리뷰를 할 수 있겠다는 만족감과 함께 작년 여름을 함께한 박연준의 <여름과 루비>가 떠올랐다. 아직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의 유나와 다미를 만나기 전이었다. 마침내 퍼즐이 맞춰진다. 여름과 루비, 유나와 다미, 실비와 앙드레. 평행우주에서 만났던 것 같은 친구들. 물론 ‘빛이 다가올 때’를 읽은 이후로 계속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평행우주에서 만났을 거야.




어떤 우정은 너무 사소한 이유로 끝나버리고 어떤 우정은 끝나지 않았지만 끝난 것만 못하고 어떤 우정은 관계와 상관없이 강제종료된다. 남은 건 죄책감. 더 일찍 내 감정에 충실하지 못해서 놓쳐버린 시간들, 그렇게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 관계.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랑이 된다.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미욱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걸까요. -56p, 여름의 빌라


해지에게 내가 그저 삶을 구성하는 한 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당시 나를 때때로 슬프게 했다. -89p, 고요한 사건


어떤 상처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잠복해 있다가 작은 자극에도 고무공처럼 튀어올랐다. -148p,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


그녀가 갈망하던 것은 무엇이었나. 뭔가 특별한 것, 고양시켜주는 것, 그녀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줄 그 무언가. -194p, 흑설탕 캔디


나는 그런 일을 겪은 것이 내가 아니라는 데 안도했고, 그렇게 안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262p, 아카시아 숲, 첫 입맞춤




그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했지만 내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결국 우리는 헤어지지도 못했는데, 나는 나 혼자 적립하고 있던 서운함을 핑계삼아 이 우정을 소중히 다루지 않았다. 다른 삶을 섬세하게 다룰 자신이 없어서 방치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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