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바깥은 여름>
진짜 좋은 거, 정말 좋은 거. 그런데 대다수는 영영 모를 거. 그런 게 세상 어딘가에 엄연히 존재한다는 걸 생각하면 놀랍지 않아요, 이선생?
-174p, 풍경의 쓸모
놀랍지 않다. 곧 등장할 <여름의 빌라>와 함께 여름 필독서로 많이 등장하는 <바깥은 여름>이 실제로는 겨울을 닮았을 뿐 아니라 '상실'을 주제로 그려낸 동심원이라는 건 예상할 수 있었다. <2022년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미리 읽어둔 '홈 파티'의 해설과 실눈 뜨고 읽은 다른 리뷰어들의 후기에 의하면 이 책은 많이 슬픈 이야기일 테다.
욕망과 소외감에 집중한 다른 작가들처럼 좋아서 되새길 시간을 충분히 가지려고 아껴읽기도 했지만 감정을 가라앉힐 시간도 필요했다. 김애란 작가가 추천사를 쓴 권여선의 <아직 멀었다는 말>과 비슷할지 모르겠다. <아직 멀었다는 말>에 수록된 2017년작 '손톱'을 읽은 직후 이어서 <바깥은 여름>에 수록된 2016년작 '노찬성과 에반'을 읽고 덜 아문 상처 위로 날 것의 고통이 중첩되는 경험을 했다. 먼저 읽은 '손톱'의 방식과 굳이 비교하자면 '노찬성과 에반'을 비롯한 <바깥>의 수록작, 그러니까 김애란 작가는 '잘 개어놓은 수건처럼 반듯하고 단정한(97p)' 구석이 있다. 그래서 때로는 더 먹먹하다.
2000년대에 읽었던 김애란의 초기작들이 어땠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여전히 젊지만 그 시절 당연히 젊었던 그 청량함의 여운만 남아있다. 그때도 달콤한 표지 너머의 단정하고 고된 문장에 반쯤 놀라면서도 매료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가짜 크리스털처럼(169p)' 반짝이는 태국 산호섬의 여름을 지나 사촌언니의 집이 있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도착하면 표지의 빛바랜 크림색과 '남의 집에서 떼다 붙인 커튼처럼(227p)' 눈에 파란 물이 들 것 같은 하늘색을 만날 수 있다. 쓸쓸한 와중에 묘하게 명랑한 표지의 색감은 종착역에 도착해서야 온전히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저 견딜만해져서 더 이상 내 일상을 주도하지 못하게 된 대상포진이 한때는 먼 여행을 떠나게 한 추진력을 제공했었다는, 너무 반복해서 빛바랜 그 이야기로 돌아온다.
여름은 찬란하기만 할 수는 없다.
그 피로 속에는 앞으로 닥칠 피로를 예상하는 피로, 피곤이 뭔지 아는 피곤도 겹쳐 있었다. -14p, 입동
있잖아, 에반. 나는 늘 궁금했어. 죽는 게 나을 저도로 아픈 건 도대체 얼마나 아픈 걸까?
-62p, 노찬성과 에반
어느 추운 지방에서는 몇몇 입김 모양도 단어 노릇을 한다. -138p, 침묵의 미래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200p, 가리는 손
나는 어떤 시간이 내 안에 통째로 들어온 걸 알았다. 그리고 그걸 매일매일 구체적으로 고통스럽게 감각해야 한다는 것도. -242p,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새해의 투지를 전년도 12월부터 당겨 쓰고, 양력 생일인 입하까지 반년 동안 매일 더 나은 나로 태어나 뭐라도 족적을 남기려는 시도를 5년째 하고 있다. 상실로 점철된 이 책이 지나온 2010년대의 나 역시 매년 상실을 겪었고 겨울과 봄은 특히 엄혹했기에 한여름 휴가철에 돌아오는 할머니 기일은 오히려 축제에 가까운 기념일이다. 겨울과 봄을 통과한 나를 있게 한, 할머니의 고된 삶을 기억하는 날. 여름의 햇살을 가득 품고 단단해져서 다시 여름이 올 때까지 살아남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