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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Jul 22. 2024

혁명은 투표 상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사벨 아옌데 <영혼의 집>

-하지만 외할머니,

우리 집안에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없지.

우리 집안에서는 사람들이 공평하게 골고루 미쳐있기 때문에 제대로  미치광이가 나오기 힘들지.



                                                      2 67p, 알바




아버지 세베로  바예 대신 실수로 독살당한 언니 로사에게 약혼자 에스테반 트루에바를 물려받은 클라라는 <영혼의 > 영혼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다. 클라라를 두고 에스테반과 남몰래 경쟁하던 누나/시누이 페룰라가 떠나고   모퉁이  집은 클라라가 품은 '영혼들' 자가증식하는 수많은 골방을 가진 미로가 된다. 클라라의 장녀 블랑카는 에스테반이 공들여 재건한 트레스 마리아스 농장에서 낭만적인 여름을 보내다 자연스럽게 어린시절 친구인 페드로 테르세로와 사랑에 빠진다.


마르케스의 마술적 사실주의와 함께 진한 로맨스와 다양한 정치활동가를 주역으로 삼은 이사벨 아옌데의 <영혼의 집>은 작가 소개와 뒷표지만 봐도 상당히 무게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의 숙부인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과 칠레의 국민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포함해, 실존 인물이 모델인 상징적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 작품은 격동의 20세기를 보낸 라틴 아메리카의 인물과 사상을 엿보기에도 흥미로운 점이 많다. 서술자는 클라라의 회고록을 참고한 3인칭이었다가, 손녀와 함께 회고록을 재구성하는 외할아버지의 시점이었다가, 마침내 손녀의 시점으로 넘어오지만 마술적 내러티브에 홀려서 정신없이 읽다보면 시점보다는 각 인물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농장 관리자 집안의 자손들, 거의 한 세대의 텀을 두고 재등장하는 누나와 동생 등 델 바예-트루에바 가문과 반복해서 연을 맺는 사람들의 이름과 사건이 헷갈릴 정도로 중반부의 서사는 휘몰아친다. 클라라의 사망 이후로 '영혼만 남은 집'에서도 완고한 보수주의자인 세대주 모르게 수많은 혁명적 은신처가 제공되고 블랑카에 이어 모두가 사랑하는 손녀 알바까지 금지된 사랑에 목숨을 건다. 아옌데 대통령의 측근으로 설정된 하이메 삼촌은 살바도르 본인일까?




클라라는 나이도 어리고 세상 물정에도 어두웠지만  상황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는   있었다. 그래서 클라라는 모피 코트에 스웨이드 부츠를 신고 억압과 평등, 권리에 대해 설교하는 엄마와 엄마 친구들과 투박한  앞치마를 두르고 손은 동상에 걸려 시뻘겋게 , 중노동에 시달리는 여직공들의 서글프고 체념한 듯한 표정이 그렇게 대조적일  없다고 자기 노트에다가 적었다.

-1 147p, 영험한 능력을 지닌 클라라


얘야, 이건 양심의 가책을  받으려고 하는 거란다. 그렇지만 불쌍한 사람들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단다. 그들에게 필요한  불우 이웃 돕기가 아니라 정의야. -1 241p, 영혼의 시대


그들은 얘기할 것도 많고,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아 합의를 봐야 할 문제들이 태산같이 쌓여 있지만 침묵 속에서 보내는 그 삼십 분만큼은 두 사람 다 마땅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되도록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각기 상대방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1권 289p, 연인들


니콜라스에게 가난은 트레스 마리아스에 사는 소작인들과 하이메 형이 도와주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추상적이고 동떨어진 개념이었다. 니콜라스는 한번도 가난을 접해  적이 없었다. 아만다가, 그렇게 친밀하게 느껴지고  안다고 생각했던 아만다가 갑자기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1 404p, 형제들


알바는 그 분위기에 완전히 도취되었지만, 미겔은 선거는 장난에 지나지 않으며, 선거는 낡은 주사기에서 바늘만 빼서 교체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누가 이기든 다를 게 없고, 혁명은 투표 상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피로써만 이룰 수 있다고 설명했다. -2권 162p, 깨달음


구릉지대에 있는 그의 푸른색  절반이 폐허가 되었고, 마루가 불탔으며, 창문은 모두 깨졌다. 이웃 사람들의 말대로 군인들의 소행인지, 군인들의 말대로 이웃 사람들의 소행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2 249p, 공포의 시대


 


니베아, 클라라, 블랑카, 알바로 이어지는  바예-트루에바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때로는 그녀들에 대한 에스테반의 마음을 통해 이들이 헤쳐왔을 시간을 고통스럽지만 흥미롭게 살아볼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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