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 <백년해로외전>
생이별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사람이 죽어서 이별하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억지로 헤어질 때 쓰는 말이라는 걸. -57p
언제나 그 시기를 지나는 동안은 결코 끝을 예감할 수 없다. 끝나고 나서야 그게 마지막이었음을 깨닫는다. -210p
우리 모두가 누군가에게는 젊은이고 누군가에게는 늙은이야. 너무 젊거나 너무 늙은 건 없는 것 같아. 그래서 그런 이유로 용서받아야 하는 사람도 없고.
-299p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뒷날개에서 발견한 '세실, 주희'를 읽어보고 싶었는데 해당작품이 수록된 <바비의 분위기>(이하 <바비>)와 눈이 맞았고, 읽고 있던 <영혼의 집>과 시너지가 있었던 <바비>를 비교적 단기간에 독파했다. 대상수상작인 '세실, 주희'는 말할 것도 없지만 <바비> 수록작은 하나같이 주옥같은 작품이라 매번 사유의 스케일이 확장됐다.
내가 <바비>를 읽는동안 박민정 작가는 <백년해로외전>(이하 <백년>)을 출간했다. '신세이다이 가옥'과 연결될거라 짐작하고 있었는데 <바비> 리뷰를 본 저자께서 <백년>의 친필사인본을 선물로 보내주셨다.
'신세이다이 가옥'의 매력 넘치는 사촌들의 이야기가 깊어지면서 현재와 과거가 교차된다. 프랑스 언니의 대척점에 새로운 인물인 바닷마을 언니가 등장한다. 이들은 유럽과 북미에서 타자화된 아시안 여성과 한국에서 타자화된 결혼이주 여성이며 가족이면서 가족이 아닌 관계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프랑스인이 된 사촌언니,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처럼 사고하는 사촌 새언니의 교차점에 있는 화자는 사촌조카를 통해 '고모'로 불리면서 후암동 시절 '고모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댓글들을 읽다가 어쩐지 기시감이 들어서 반쯤 읽었던 <백년>을 다시 펼쳤다. 단편에서도 문장마다 하나의 세계를 담아내던 저자는 장편을 통해 각각의 인물에게 그 서열과 세대에 따른 서사를 부여했다. 특히 프랑스 언니 본인의 서술과 함께 시야는 급격하게 넓어지고 세계는 그만큼 좁아진다.
나는 할 수 없었는데 너는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서 좋다고 생각했다. 눈치를 보지 않는 수아가 언뜻 나와 같다고 생각하면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지만 학생들 같다고 생각하면 거슬렸다. 두 개의 상반된 마음 모두 내 진심이었다. -73p
문득 예리가 과거 내 작품을 읽고 집안의 사생활을 공개했다며 화를 냈던 일이 떠올랐다. 그애가 얼마나 유명한 유튜버였는지 나나 우리 가족은 알 턱이 없었다. 이름과 얼굴을 걸고 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화를 낸다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103p
잠이 오지 않는 밤마다 나는 댓글들을 읽었다. 이 계정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났던 건지 알고 싶었다.
-135p
오랫동안 예리의 구독자였다는 사람은 '돌아선 팬이 더 무섭다는 건 잘 아시겠죠'라며, 자신은 예리와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있는데 이미 그때 이상한 사람이라는 걸 눈치챘다고 했다.
-140p
나는 호텔에서 밤을 보내는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언니의 생김새, 수아의 생김새, 나의 생김새, 그리고 프랑스 언니의 생김새. 너무 표시가 나는 어떤 얼굴들에 대해서. -165p
부모가 백인이고 백인 가정에서 자랐으므로 야엘의 ethnicity는 당연히 백인이었다. 'race'가 아니라 'ethnicity'인데 뭐가 문젠지 모르겠다고 대답하던 야엘은 문득 이런 설명을 해야 한다는 데 수치심을 느꼈다. -225p
내가 소설임을 밝히며 일간지보다 더 작은 지면에 글을 발표했을 때조차 큰아버지네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야엘이 지닌 당사자성과 일기-소설이라는 형식을 생각하면 야엘이 글을 연재하는 건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었다. -250p
내가 쓰고 싶었던 가족 이야기는 나의 가장 깊은 수치심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종류의 이야기라는 것을. 지금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야엘과는 달랐다. -304p
화자인 주현은 완벽하지 않다. 그럼에도 사촌들과 고모들에 대한 서술에서 비장함이 느껴진다. 한 가지 감정으로 수렴되지 않고 순간순간 모순되는 생각의 연결고리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엔딩크레딧처럼 작가의 말이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