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덕후 한국언니
드라마는 갔던 곳을 다시 가고 싶게 하고, 갔던 도시와 나라에서 가지 못했던 곳을 가고 싶게 했다. 그러나 책은 한 번도 여행지로 생각해 본 적 없던 장소를 꿈꾸게 했다. 어떤 책은 그 언어로 읽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했다. 나는 왜 자꾸 수동태를 쓰는 걸까.
파리 여행을 포기하게 된 그 해, 이미 (미국에 두 번 다녀온 상태였고) 영어는 거의 다 완성되어 있었는데 수업을 듣고 단어장을 뜯어먹으면서도 깨닫지 못했다. 내가 영어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무심코 영어책 펼쳤는데, 이런! 눈트임의 순간이었다. 영어로 의학 논문만 읽었지, (최애 장르인) 소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다. 그 책은 <채식주의자>가 부커상을 받은 해에 구입했던 밀레니엄 1권 영어판이었다. 그때 나의 소감은 (너무 많이 인용해서 민망하지만) ‘스웨덴어는 30년은 안 걸리겠지.’였다.
그로부터 2년 후 기어이 코로나에 걸렸고, 분노의 바이링구얼 독서 기록이 쌓여갔다. 여행 사진을 자랑(?)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기어이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시작이 아니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시작은 비교적 쉽다. 어떤 시리즈를 완성해 본 적이 없었다. 서평이나 드라마 리뷰처럼 끝나지 않는 프로젝트가 차라리 편했다.
2022년 5월, ‘애틀랜타에서 인생샷 건신 썰‘을 쓰다가 인스타그램 분량 제한의 순기능(?)을 발견했다. 이것이 대발견이다. 인스타그램은 매일매일 그만 쓰라고 할 때까지 써도 지치지 않을 정도의 글자수를 고수했다. 이미 그걸 활용해서 ’서평 못 쓰는 병‘을 고치고 1일 1포에 가까운-실제로는 주 2회 정도 서평을 쓰는-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에세이 입트임도 지나있었다. 지금은 책방산책 포스팅이 고정되어 있는(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책방 오늘‘도 있다!) 자리에 고정해 두었던 2022년 생일일기. 여기 중요한 단어가 등장한다.
분노의 빈지리딩의 정점에 있던 <버지니아 울프 디 에센셜>과 영문판 <오만과 편견>을 읽다가 흥을 얻어서 ’산책덕후 영국언니‘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이미 리베카 솔닛의 <Wanderlust>(<걷기의 인문학> 원서)도 읽었고, 역마살을 영역하기 위해 검색해보다 wanderlust(방랑욕구)를 발견했으며 시카고 산책 포스팅(블로그)에 wanderlust로 언어유희를 하기도 했다. 로런 엘킨의 <도시를 걷는 여자들>(역자 홍한별, 원제는 프랑스어 <Flâneuse>)도 읽고 있었다.
로런 엘킨의 다른 책을 찾아보다가, 그가 시몬 드 보부아르의 <Les Inséparables>의 영어판 역자인 것도 알게 됐다. (한국에서는 지난여름 백수린 소설가의 번역서 <둘도 없는 사이>로 출간되었다.) 문제는 원더러스트와 플라뇌즈라는 단어의 생소함이다. 원더러스트는 역마살의 그 느낌(아! 이걸 뭐라고 해야하지?)이 들지 않고, 플라뇌즈는 프랑스어 사전에 없는(표제어가 아닌) 단어인 데다, 사전적 정의도 괴랄하다. <도시를 걷는 여자들> 프롤로그를 읽으면 알 수 있다. 일단 <도시를 걷는 여자들> 한국어판은 제목이 큰 도움을 준다.
탈부착 메모지를 발명하듯 우연히 ‘산책덕후 영국언니’를 조어한 그 포스팅으로 입트입이 되어 장편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는데 두 번째 미국여행의 후반 30% 지점(뉴욕을 떠나 애틀랜타 로드트립을 하는 구간)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다시 시카고로 돌아가기 전, 잠깐 짐바브웨에 다녀온다. 미국 에세이를 완성하기 위해 연재에 익숙해지는 트레이닝을 했다. 지금은 찬밥이 되어버린 그 시리즈를 8부작으로 완결하고 다시 시카고에서 출발해 차근차근 챕터를 쌓아가다 공모전 한 달 전 브런치 작가 승인을 받았다.
그때 ‘산책덕후 한국언니’가 되었다.
처음 ‘산책덕후 영국언니’를 조어했을 때는 영국언니들의 소설과 에세이를 읽으면서 대리만족하고 있었다. 코로나로 ‘격리’되었으니까. 산책을 외주화하여 멘탈산책만(?) 했다. 브런치 작가 승인 이후, 묵은 쓰기 욕구를 채우느라 심각한 산책부족을 겪었다. 다시 1년이 지나서야 진짜 산책을 시작했다.
작년 처서부터 맹렬하게, 1월과 8월 빼고 맹렬하게,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좀 모르겠다. 여전히 산책과 관련된 이야기에 설레지만, 발로 하는 산책은 그만 맹렬해도 될 것 같다. (다른 운동을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