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덕후 뉴욕언니
문화생활이나 짧은 휴식, 특히 독서 기록에 자랑을 곁들이기 전, 소셜미디어 경험 콘텐츠의 핵심에는 여행이 있었다. 여행은 인생의 모습만큼 다양하고 일과 휴식이라는 스펙트럼 속에서 독특한 여행자의 페르소나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2010년대에는 일종의 모범답안이 있었다. 인스타그래머블한 여행.
산책과 탐색과 방황의 필요, 욕구, 수행능력을 깨닫게 한 결정적 장소가 뉴욕이라면 뉴욕을 향하고, 다시 향하고, 그리워한 흔적이 쌓여 이 모든 것을 콘텐츠화한 결정적 장소는 인스타그램이었다. 여행을 하다 보니 기록할 플랫폼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다. 플랫폼에 여행을 기록하고 싶어서 퇴사여행을 기획했다. 실패한 스페인 여행과 실패한 그 모든 취업활동과 곧 실패할 자영업을 보상할 수 있는 경험으로 이만한 것이 또 있을까.
자랑하기 위한 여행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유학답사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고 여행은 처음의 기획과는 달라졌지만 관광이나 비즈트립보다는 방랑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갔다. 일부러 찾아가지 않아도 여러 번 지나가게 되는 뉴욕대학교(NYU)처럼 방랑하기 좋은(그리고 한국어가 참 흔한) 동네로 가득한 곳이 바로 뉴욕이었다. 이스트 강에서 일출을 배경으로 조깅하는 강아지를 보며 명상하던 곳.
뉴욕의 가을은 따뜻했고(더웠고) 10월 말에도 해가 일찍 떴다. 보스턴에 가서야 가을 해가 너무 일찍 진다는 걸 깨달았다. 귀국 전 마지막 시외여행이었던 보스턴 여행은 서머타임의 끝물이었다. (보스턴이 포함된 30일 여행은 2016년이었고, 시카고와 남부가 포함된 35일 여행은 2019년이었다.) 뉴욕으로 돌아온 다음 날 인천행 국제선을 타기 위해 댈러스를 경유해야 했는데 보스턴에서 늦게 출발한 볼트버스가 꽉 막힌 11번가에 들어서지 못하고 갑자기 시티투어를 하기도 했다. (이 부분은 후술할 미국산책에서도 언급했던 3일간의 귀국여행이다.) 그 주에 박근혜가 내려가고 트럼프가 올라갔다.
따뜻한 10월의 뉴욕에서 수많은 돌발상황을 이겨냈다. 여행하는 순간에는 그럼에도 괜찮아, 뉴욕이니까-하고 넘어갈 수 있는 에너지가 넘쳐흐른다. 물론 그건 내가 치명적인 사고가 나거나 중요한 짐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덜 중요한 짐은 많이 잃어버리고 그냥 버리기도 했으며 덜 치명적인 사고는 거의 매일 일어났다.) 여분의 여권사진과 여권사본을 부적처럼 만들어서 각각의 가방에 넣어두었고 그때 만든 여권과 사본들은 두 번째 여행을 거쳐 지금도 갖고 있다.
브루클린의 눈부신(일출을 반사하던 맨해튼뷰) 아침도 기억한다. 브루클린(동쪽)과 뉴저지(서쪽)의 오전과 오후를 다 겪었다. 동쪽의 아침과 서쪽의 저녁에 해를 등지고 봤던 맨해튼이 강렬하게 남아있는 이유를 이제야 깨닫는다. 그 시간에 해를 보려면 맨해튼을 등지고 반대쪽을 봐야 하지만 해를 등지고 맨해튼을 보면 유리의 성이 단체로 반사를 외치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브루클린 브리지 파크 위 언덕의 아침과 뉴저지 해밀턴 파크 또는 허드슨 강변 트램의 저녁을 추천한다.)
우연히 또는 일부러 찾아간 자유의 여신상 뷰스팟도 여러 곳이다. 맨해튼의 배터리파크, 브루클린의 선셋파크, 뉴저지의 리버티 주립공원(여신이 있는 섬과 가장 가까운 공원)에 갔을 땐 밤이나 흐린 날이었지만 괜찮았다. 공원 가는 날에 비는 거의 오지 않았고, 뷰를 핑계 삼아 공원에 가려면 엄청나게 걸어야 했다. 예산이 거의 없었던 2016년에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서 계속 걸었고 (비 오면 서점) 매일 미술관이나 수영장, 레스토랑을 방문했던 2019년에는 (칵테일과 팁으로 예산을 초과해 기념품은 못 샀고) 밀린 산책까지 여행계획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걷기를 위한 운동화를 구입해서 매일 걸었다.
팬데믹 후 5년, 혹은 지난 10년 동안 누적된 슬픔과 분노는 여행 한 번으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괜찮아, 뉴욕에 두 번이나 다녀왔으니까-하고 버틸 수 있는 잔열이 3년은 지속되었다. 그때 두 번째 미국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 3년 동안 운동부족으로 식물인간이 되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운동부족을 상쇄하지 못한 채 라이팅(writing) 좀비가 되었지만 그 3년은 <가을의 미국산책*>을 쓰기 위한 예열의 기간이 되었다. 그건 아주 긴, 산책 이야기의 프롤로그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것도.
(계속)
*필자의 첫 번째 브런치북
<가을의 미국산책>,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