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다시 봄이 오겠지>
설 연휴를 앞둔 주말 모임은 우리들의 세상이었다. 혜미는 입사지원서에 휴학 중이라는 거짓과 함께 친언니의 생년월일을 기재했다. 그러고보니 회사 사람들은 그녀를 '아름씨'라고 부르지 않았다. 뭐라고 했더라......
혜미에 대한 기억은 그애가 말도 없이 그만둔, 그 다음의 만남부터였다. 회사에서는 가급적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눈에 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그애가 사칭한 친언니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혜미, 그러니까 아름은 그 겨울에 막 스무살이 되었다.
대학교에 가기 전에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싶어서 입사했는데, 스무살이라는 것을 알면 남들이 무시하고 오지랖을 떨까봐 언니 신분증을 몰래 가져와서 스물두살인 척 하고 다녔다. 나와 록시는 그애가 돌아온 그 시점에 연락처를 혜미로 수정해버렸다. 아름의 언니의 본명은 그렇게 미궁으로 사라졌다.
혜미는 놀러나올때도 종종 언니 신분증을 가지고 다녔다. 다음 달에 대학생이 될 예정이지만 지금은 고3이고, 만 18세이기 때문에 어딘가에서 입장거부를 당할까봐 잔뜩 긴장해있었다. 하지만 회사와 마찬가지로 사회에서도 그녀를 열여덟이나 스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혜미와 록시 둘 다에게 그 누구도 신분증을 요구하지 않았다. 설 연휴가 지난 다음 주말부터 언니 신분증은 원래 위치로 복귀했을 것이다.
연휴 직전까지 록시가 우리에게 클럽의 맛을 잔뜩 보여주었다. 이제는 클럽 앞에서 만나도 자연스러울 정도로 나와 혜미까지 익숙해졌다. 우리는 8시쯤 술자리를 시작하거나, 각자의 무언가를 하다가 10시 반이 넘으면 클럽 앞에서 만났다. 그리고 12시 반이 지나면 인파에 정신없이 휩쓸렸고, 록시를 잃어버렸다. 록시가 우리를 잃어버렸거나, 그냥 버렸을 것이다. 처음 록시를 놓친 다음 주까지는 다시 록시를 찾기 위해 즐기지 못했는데, 그 다음 주에는 록시를 되찾지 않기로 했다. 록시 찾기는 1시간이 넘으면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그 1시간이 피크타임이었다.
우리는 록시를 포기했다.
어느 일요일 오후, 겨울 햇살에 눈이 부셔서 일어나보니 옆에 혜미가 자고 있었다. 우리 집은 아니었다. 혜미의 집인가? 혜미는 어쨌든 고등학생인데......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곧 4시가 될 참이었다. 우리가 어제 어디에 갔었지? 기억이 좀 뒤죽박죽이라 문자를 확인하려고 메시지함을 열어봤는데, 읽지 않은 록시의 문자가 잔뜩 와 있었다.
-언니, 어디야?
-언니, 나 거기 주차장인데.
-혜미랑 같이 있어? 어디야~~
-나 오늘 도망간거 아니야~~
-ㅇㅇ??
문자가 온 시각은 오전 5시 12분에서 23분 사이였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전날 새벽 2시 넘어서까지 록시를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확실해졌다. 그런데 왜 3시 이후는 기억이 없지? 혜미를 깨워야 퍼즐이 조립될 것 같다. 그런데 혜미가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방해하기 싫었다. 잠도 푹 자고, 어려서 좋겠다.
머리가 아팠지만 속은 괜찮았다. 주방에서 온수를 받아 인스턴트 커피를 탔다. 혜미가 그대로 자고 있는지 확인한 뒤, 다시 거실로 나와서 컴퓨터를 켰다. 달리 하고 싶은 것도 없었지만 해야할 일도 없었기에 단순한 게임을 하면서 몽롱함을 몰아냈다. 그런데 여긴 대체 누구 집이지?
우리가 자고있던 방과 주방이 포함된 거실, 그리고 발매트가 깔려있는 화장실을 제외하면 미지의 세계로 연결되는 문은 하나밖에 없다. 그렇다면 혜미의 언니와 부모님이 다함께 사는 집은 아닐 것이다. 언니만, 혹은 부모님만 함께 사는 집일 가능성은 있었다. 아니다. 아무리 봐도 이 주방은 부모님의 주방이 아니다. 언니와 혜미가 살고 있는 집이거나, 제3자의 집일 것이다.
"언니, 일어났으면 문자라도 하지 그랬어?"
모니터 앞에서 한참 추리에 빠져있는데, 미지의 문이 열리면서 록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너도 여기서 잤어?"
"당연하지. 내 집인데."
"그럼 우리가 잔 방은 누구 방이야?"
"거기가 원래 내 방이고."
"여기는 누구 방인데?"
"우리 오빠. 출장갔거든."
(계속)